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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시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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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때(지금도 없지만, 그때는 확실히 더 없었다) 끼리끼리 모이는 사이에서 "시래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숙취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어슬렁거리면 어김없이 시래기로 불렸다. 힘없이 퍼져있는 모습이 시래기를 연상시키고, 쓰레기와 비슷한 어감 때문에 친근감을 비하로 표현하려는 치기 때문이었다. "니도 시래기구먼" 그래놓고 "그래도 우린 국이라도 끓여 먹으니까 영 버릴 놈들은 아니다"고, 웃기지도 않은 말을 하며 킥킥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놓고 또다시 시래기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어스름이 채 되기도 전에 술잔을 비웠고, 이튿날 해장을 한답시고 시래깃국을 사 먹었다. 무엇보다 저렴했기 때문에 가벼운 주머니 형편에 안성맞춤이었고, 여느 해장국처럼 무겁지 않았다. 쓰린 속을 달래려다 본능에 충실한답시고 벌건 국물을 들이켰다가는 '이렇게 속을 버려가는구나'하는 자탄에 빠진다. 그에 비하면 막장이나 된장을 풀어놓은 시래깃국은 속을 편안케 하는 착한 해장국이다.
시래기의 사전적 의미는 무청이나 배추의 잎을 말린 것인데 주로 무청이 시래깃국의 재료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18년(1847년) 9월11일 기록을 보면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講武)의 연기를 상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강무는 임금이 친히 나서는 군사훈련 겸 수렵대회다. 유자한은 "(전국적으로) 풍년이라 하더라도 (강원도는)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강무를 미뤄달라고 했다. 이때 얘기한 지축이 바로 시래기다. 백성들의 빈궁함을 위무하는 주된 음식이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은 괄시받기 일쑤인 듯싶다. 임금은 이 상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래 시래기는 비타민과 미네랄, 식이섬유가 풍부해 웰빙식품으로 대우받고 있다. 흔하지만 좋은 음식이다. 특히 요즘처럼 바람이 차가워지고 비라도 추적거리면 뜨끈한 시래기 국물 한 모금에 가슴마저 데워질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시래기를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노래했다.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중략)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화가 났다/"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후략)'(공광규 '시래기 한 움큼' 중에서)

시래깃국 먹으면서 떠오를 몇몇 얼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박철응 건설부동산부 차장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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