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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발견]고려의 천재화가 이녕을 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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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곽희의 '산수(山水)'

북송 곽희의 '산수(山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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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의 곽희(1020~1090(?))는 황실의 도화원에서 근무한 화가로, 중국 산수화의 한 흐름을 창조한 사람이다. 그는 3원법(三遠法)을 주창하여 동양 산수화의 원근 표현의 기준을 세운다. 산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을 고원(高遠)이라 하며, 청명한 색을 써서 웅대함을 표현한다. 산 앞에서 산의 뒷면을 넘겨다보는 것을 심원(深遠)이라 하고, 무겁고 어둡게 하여 깊이감을 부여한다. 평원(平遠)은 먼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밝고 어두움을 고루 섞어 광활함을 드러낸다. 이런 기법은, 투시도를 중시하는 서양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동양화의 세계를 일구는 중대한 안목(眼目)이 되었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화가는 곽희가 아니라, 그보다 50년쯤 뒤에 태어난 이녕(李寧)이다. 이 땅의 화인(畵人)으로 가장 빼어난 세 봉우리를 꼽는다면, 신라의 솔거와 고려의 이녕, 그리고 조선의 안견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솔거는 고대회화의 거장이요, 이녕은 중세를 주름잡은 천재화가이며, 안견은 이 땅의 근세회화로 나아가는 길을 닦은 대화가로 볼 수 있다. 우린 아쉽게도 3봉 중에서 2봉의 작품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본관은 전주이며, 이준이(李俊異)라는 화가에게서 공부를 했다. 스승 이준이는 어린 이녕의 솜씨가 너무나도 뛰어난지라, 가르치면서도 공경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고려의 화가 공직인 화국(畵局)에 근무했고 송나라로 가는 추밀사(이자덕) 일행과 함께 파견된 기록이 있다. 남아 있는 작품이 없으나, 당시를 휩쓴 곽희의 화풍으로 그의 그림을 연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산수화가였던 송나라 휘종황제는 이녕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그림이 고려에 있었다니…. 그 나라 전체를 통틀어 이녕만이 묘수(妙手)를 터득했구나." 황제는 당시의 궁궐화가들인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을 불러 이녕의 화법을 배우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입궐한 이녕에게는 비단과 음식을 내렸다. 대대로 이어 내려온 예술황제의 자존심을 지닌 북송황실에서, 이 같은 파격적인 예우를 한 것은, 그 화격(畵格)이 북송을 뛰어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예종은 송나라의 상인이 바친 그림 하나에 꽂혀 있었다.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였는데, 아마도 천수사는 송도(개성)의 동쪽에 있던 사찰로 숲이 우거졌으며 노래와 피리소리가 끊이지 않던 고려의 명소였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짐이, 송인(宋人)에게서 큰 보물을 얻었노라. 북송 회화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단한 그림이로다." 이렇게 자랑했을 때 한 신하가 물었다. "전하. 어찌 송인이 고려의 사찰을 이토록 정미(精美)하게 그렸을까요. 놀랍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러니, 더욱 귀하지 않겠는가." 그때 화국에 근무하는 이녕이 문득 말했다. "그 그림은 제가 그린 것이옵니다." 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송인에게서 산 것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림 뒤에 배접된 비단을 뜯어보시면 제 이름과 제시(題詩)가 있을 것입니다."

곽희의 중국이 오히려 우러른, 글로벌한 고려화가 이녕은 어느샌가 잊혔고 작품도 사라졌으며 저 에피소드 속에 들어 있는 두 작품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의 이름만 남아 있다. 곽희가 그렸던 관념산수의 정수를 골수에 익힌 뒤, 그것을 실경(實景)에 적용해, 고려의 진경(眞景)을 얻어냈을 이녕의 그림들을 만나보지 못하는 이 허기를 어찌할 것인가. 겸재 정선이 일대 바람을 일으킨 조선 진경산수의 빼어난 선구(先驅)가 그의 붓끝에 있었음을 어찌 잊고 살 것인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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