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의전 문화 여전, 경직된 의전문화 넘어야 할 산
이 부회장은 지난해부터 '삼성그룹의 의전 관행 철폐'에 대해 직접 행동으로 드러낼 정도로 조직문화 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잦은 출장으로 해외를 오가면서도 별도 수행원 없이 직접 짐 가방을 끌며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 일환이다. 이 부회장은 해외 사업장의 과도한 의전 절차를 없앤 데 이어 최근엔 그룹 계열사 사장단과 고위 임원을 향해 특권 의식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현장 조직에서는 구시대적 의전 문화가 여전하다.
의전의 또 다른 부작용은 심각한 '소통 오류'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삼성의 또 다른 계열사 스태프부서는 최근 사장 집무실의 시계를 교체하기 위해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사장이 "언제든 사무실로 와서 시계를 바꿔 달라"고 말했지만 직원들이 '집기 교체는 사장님이 부재중일 때 해야 한다'는 몸에 밴 의전 공식을 따르느라 눈치보며 사장이 사무실을 비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시계는 사장이 퇴근한 뒤에야 교체됐다. 이 장면을 지켜본 한 직원은 "사장님이 아무리 '이런 의전은 필요없다'고 말해도, 중간관리자들은 '다음 번엔 신경쓰이지 않도록 의전을 더 잘 하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한다"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지나친 의전 문화는 기업의 역사만큼이나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의 한 지방사업장에는 보안 직원들 사이 속칭 '개미청소'라 불리는 작업이 있었다. 오너(owner)가 혹은 그룹 수뇌부급 인사 등 이른바 'VIP'가 사업장을 찾을 때면 방문 시각에 맞춰 해당 건물 로비는 물론 사업장 내에 직원들이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해당 사업장 각 조직별 스태프 부서에는 '0시(방문시각) 전후로 직원들이 사업장을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라'는 지침이 전달된다.
삼성의 이 같은 경직된 의전 문화는 글로벌 기업으로서 삼성이 넘어야 할 산으로 지적된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은 최근 이 부회장의 리더십을 다룬 기사에서 "이 부회장은 삼성에서 가장 국제적인 인물"이란 평가와 동시에 "삼성의 성공을 이끈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도 삼성이 한국의 뿌리를 넘어서도록 성장시키는 것이 이 부회장의 과제"라고 분석했다. 삼성이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강점은 유지하되, 수차례 지적돼 온 삼성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해외파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그룹 내에서 '글로벌 마인드'로 이 부회장과 매우 잘 통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 과제 중 하나는 여전히 많은 '구세대 삼성맨((old-timers of Samsung)'들이 '글로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2008년 삼성전자 사장으로 영입돼 SDI, 카드, 물산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한 최 사장은 평소에도 종종 삼성의 불필요한 의전 스타일에 대한 피곤함을 토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 사장은 지난해 회사 내부 익명게시판에 한 직원이 상사에 대한 과도한 충성을 강요하는 업무스타일에 대한 불만을 담아 작성한 '오너십(Owner-Ship)에 관한 큰 오해'란 글에 "잘못된 임원들과 간부들이 보고 느껴야 할 글"이라며 "우리 회사가 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길고 험난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직접 댓글을 달기도 했다.
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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