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이란 말은 물론 한자어이지만, 동양에서는 사실 표절이 지금의 뜻으로 쓰인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표절은 그저 '밝히지 않고 슬쩍 훔치는' 정도의 비난을 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떳떳한 표절은 권장됐으며 재능으로 인정됐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서 바위에 엎드리고 있는 노인은 청나라의 그림책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에 있는 노인을 보고 그린 티가 역력하다. 그런데 조선의 많은 그림소비자들은 강희안의 표절을 문제 삼기는커녕 청나라의 그림책의 법식을 따랐지만 빼어나게 재창조했다는 점을 칭찬한다. 옛 예술가들은 철저한 임모의 수련으로 새로운 창조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부르기도 했다.
양심불량의 표절에 대한 단호한 비판 또한 시대적인 관행과 정서와 잣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비판이 향후 다른 표절을 막는 백신같은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건 뭐든지 부작용이 있다. 예술과 문학에서 받는 영감이 또 다른 예술로 진화하는 그 생태적 특성을 무시해선 안 된다. 고백하거니와, 내 삶의 많은 언어들은 어머니의 표절이었고 내 입에서 나간 많은 스토리들은 내가 읽었던 문학작품들의 표절이었으며 사랑에 대한 나의 깊고 슬프고 애틋한 회고들은 첫사랑의 표절이었다. 어떻게 우리가 무시로 넘나드는 영감의 파도를 막고 '좁은 방'에 기어들어가 살 수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창의는 표절의 담장 위를 걷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라. 결벽증 또한 위선일 수 있다.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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