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연구단지는 전국에서 석ㆍ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건널목에서 누가 '박사님' 하고 부르면 모두가 뒤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또 근처 중학교에서는 시험만 끝나면 수학, 과학 선생님들이 카이스트를 비롯하여 근처 연구원에 다니는 부모들이 시험 문제 오류를 집어내는 통에 여간 긴장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성적 비관으로 자살했다는 헛소문이 간간이 들릴 정도다.
내 나이 정도만 돼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의외로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니 죽으라고 공부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심지어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엿본 중3 녀석에게, 이것저것 준비하고 지니고 있어야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많이 가진 것이 오히려 불행할 수도 있음을 묘하게 깨달은 계기가 있었다. 어렸을 적 우리집은 동네에서 무엇이든 제일 먼저 샀다. 이웃들이 텔레비전을 보러 저녁마다 찾아오고 옆집 음식도 우리 집 냉장고에 보관해주곤 했다. 어느 해 에어컨을 샀는데 이게 전기를 많이 잡아먹어서 틀기만 하면 집 전기가 나갔다. 그래서 웬만한 전기기기는 다 끈 다음 에어컨을 틀었는데 덕분에 조선시대처럼 양초 밑에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에어컨을 틀면 우리 집만 컴컴하고 다른 집은 환한 기묘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한여름 시원한 에어컨으로 행복해야 하는데 어두컴컴한 집으로 행복이 반감되어버리곤 했다.
물질적 가난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지만 불평등 역시 그럴까. 이에 대해서는 찬반이 팽팽하다. 근본적으로 근대 과학기술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불평등이 심화된다면 과학기술 역시 불평등의 재생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반면 20세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대학연구소에서 한 대 있을까 말까 한 컴퓨터를 스마트폰이라는 손안의 PC로 대중화시켰다. '와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개념을 주창한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는 이 개념이 흔히 오해하듯이 급진적인 기술적 돌파구(breakthrough)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엘리트에게 한정되었던 제품이나 기술이 대중에 급속히 확산되는 일종의 '기술의 민주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으로 불평등이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면서 과학기술정책 연구자들 역시 과학기술이 물질적 결핍의 해소에서 더 나아가 '뼛속까지 사회적인 문제'인 불평등에 대해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적인 문제는 결국 사회가 해결해야지 과학기술을 믿고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김 소 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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