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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평양서 진격 멈춘 미스터리…기생 치마에 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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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사극 ‘징비록’은 지난 3일 방송분에서 일본군이 풍토병에 걸린 군사들로 인해 진격을 평양에서 멈췄다고 전했다.

풍토병은 일본군이 평양에서 6개월 동안 머무른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상륙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1592년 6월에 파죽지세로 평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후 6개월 동안 평양에 주둔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다행스럽게도 왜적은 평양성에서 몇 날 며칠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며 “이렇게 되니 민심도 차츰 수습되고 남은 군사들을 재정비하면서 명나라 구원병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고 전했다.

일본군은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속도와 기세라면 능히 압록강 일대까지 단숨에 진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왜군 장수들이 평양 기생들의 치마폭에서 세월을 보냈으리라는 ‘농반진반’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사극 '징비록'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극 '징비록'의 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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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은 저서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도대체 무엇이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을까” “무엇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하여금 평양에 엎드려 쥐죽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가만히 있게 했을까”라며 “이는 정녕 미스터리이고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송복은 고니시가 평양에 장기 주둔한 것은 “유성룡의 말처럼 ‘하늘의 도움’이라는 말 외에 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쓸모 있는 바보’가 없다”며 고니시는 “조선의 둘도 없는 은인”이라고 평가했다.

◆일본군 군량 수송로 차단돼= 이와 관련한 가장 큰 쟁점이 고니시군의 군량미 조달이다. 송복은 “평양에는 조선군이 두고 간 군량도 꽤 있었다”고 전했다. 이는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다. 유성룡은 평양에 10만석이 넘는 식량이 남겨졌다고 적었다. 평양에 식량이 상당했다면 계속 진격하지 않은 것이 더욱 의문이 된다. 평양에 저장된 곡식을 군량으로 확보했다면 후방에서 보급받지 않고도 평양을 거점으로 삼아 공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본 측 기록은 ‘징비록’과 상반된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가 쓴 ‘일본사’의 임진왜란 부분을 보면 왜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말미암아 많은 병사가 병들어 그야말로 내버려진 상태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프로이스에 따르면 왜군은 조선에서는 군량을 거의 얻지 못했다. 많은 식량이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졌고 그해 조선의 농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곡식의 씨를 뿌리지 않았으며 밀은 제때 베지 않아 썩었다고 프로이스는 설명했다.

일본군은 바다를 통해 일본에서 수송되는 식량을 육로로 보급받았다. 그런데 일본군은 서로 먼 지역에 분산 배치돼 있었고 일본에서 온 식량을 날라오려면 많은 병사를 동원해야 했다. 프로이스는 “식량을 수송하는 일본군 수는 적었고 자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조선 병사들이 여러 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 일본군을 모두 죽이고 식량을 모두 가져갔다”고 전했다.

일본은 부산포에서 한양에 이르는 곳곳에 성을 쌓고 주둔했지만 나머지 지역은 전혀 장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부산포에서 한양까지는 300명 미만의 일본군 병력으로 통행할 수 없었고, 한양에서 평양은 500명 미만의 병력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순신은 해전에서 연승을 올리며 일본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했고 ‘평양에 주둔하면서 남해를 거쳐 올라오는 수군과 합세한다’는 일본의 작전도 무산시켰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5월 옥포해전 이래 7월까지 8차례에 걸쳐 왜군을 연파했다.

◆ 평양에 식량 있었더라도= 프로이스가 전한 일본측 속사정을 더 살펴보자. 고니시는 평양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부하들에게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들을 찾아 돌아보고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고니시군이 평양에 입성한 6월 16일은 양력으로 7월 24일었다. 한여름에 겨울을 대비한다는 결정이 적절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기록은 평양에 군량으로 삼을 양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한다.

시일이 지나면서 식량난은 더 심각해졌다. 프로이스는 “겨울로 말미암아 원조를 더욱 받을 수가 없었으며 식량이라고는 오직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며 “그러나 양이 적고 상한 것뿐”이라고 전했다.

유성룡과 프로이스 중 어느 쪽 기록이 사실에 부합했을까. 이와 관련해 한 역사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고니시는 왜 북진하지 않았을까?’는 고니시군이 평양에서 식량을 대규모로 확보하지 못했으리라고 추정한다. 이 글은 ‘징비록’ 이외의 기록을 보면 윤두수 평양 수성대장이 화포 등 군수물자를 연못과 해자에 빠뜨렸다고 나온다며 이로 미루어 윤두수가 식량도 처리했으리라고 본다.

(관련 자료)
고니시는 왜 북진하지 않았을까?

평양에 양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해도 고니시가 평양에 주둔할 이유는 있었다. 첫째 부산포에서 평양에 이르는 수송로는 공격에 취약해 군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길이 되지 못했다. 조선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은 극히 미미했다. 이는 군량이 있는 평양에 머물러야 하는 까닭이 된다.

둘째 고니시군은 이순신의 활약에 묶였다. 유성룡은 “적이 본래 수륙 양면으로 합세해 서쪽으로 올라가려 했던 것이나 이 전쟁(한산대첩) 단 한 번으로 인해 한쪽 팔이 잘려버리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즉 “비록 평양을 손에 넣었어도 그 형세가 고립되고 약해지는 바람에 더 진격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전 패배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7월에는 명나라 조승훈 부대가 평양성을 공격했다. 일본 관료 출신 작가 사카이야 다이치가 쓴 책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면 고니시군은 8월 그해의 군사행동을 평양에서 멈추기로 결정했다. 그런 가운데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9월 강화를 제의하면서 주둔이 길어졌다.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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