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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52.'밀리언달러 베이비'와 죽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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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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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 로키에 환호하던 기억이 수십년 전으로 밀려난 지금에, 다시 권투를 가지고 영화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기이하다. 그 이유 때문에 아카데미 7개 부문 노미네이트란 기록이 내겐 수상쩍었다. 어느 날 별 생각없이 사온 DVD도 처박아두고 있다가 몇해가 지난 뒤에야 볼 만큼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다. 여자 복서의 이야기니까 로키의 성공담에 성적인 양념을 쳤겠지. DVD 껍질에 글로브를 감아쥐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힐러리 스웽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의 절반은 그런 선입견의 궤도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듯 보였다. 스토리는 그러나 그쯤에서 바퀴를 뽑은 뒤 허공을 향해 날았다. 다 보고난 다음, 나는 생각했다. 이 영화는 권투영화가 아니다. 죽음에 관한 질문이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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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친구와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인간의 존엄은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면 행복하게 죽을 권리도 있다. 단순히 안락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고통 없는 종말’을 맞을 권리에 대한 얘기였다. 이런 논의는 다소 불온하고 위험해 보일지 모르겠다. 죽음 앞에 두려움과 고통을, 신이 배치해놓은 까닭은, 무모하거나 일시적인 심경에 따른 자발적인 죽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 두려움과 고통을 없애버린다면, 자살이 급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살을 말리고 억제하는 일은 온당한 일인가. 자살을 하겠다는 의지는 문제 있는 생각이며 그것을 막는 의지는 합당한 생각인가. 이 점에 대해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죽음의 경계에 있는 두려움과 고통을 없애는 일은, 해악일까. 일부 절망적인 환자를 제외하고는 저 조치를 취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왜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 않은 것일까.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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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씩은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린 본능적으로 외면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뿐이지, 저쪽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건 아니다. 왜 우린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그 이유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 이유 중에, 죽은 뒤의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을 만나게 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점도 있다. 사후(死後)에 대한 정보를 살아있는 누구도 얘기해줄 수 없고,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어있기에, 우린 그걸 모른다. 이른 바 ‘햄릿의 두려움’이다. 또 다른 공포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추할 것이라는 짐작과 관련이 있다. 행복하게 목숨을 경영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면, 죽음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 또한 인간의 행복권의 일부라 할 만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 여자 복서를 통해, 그런 주장을 숨겨놓는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살아온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복싱을 좋아한다. 오로지 그것 만이 생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한 뛰어난 트레이너가 그녀의 투지를 알아보고 훈련을 시킨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1센트 샵에서 건진 보물덩어리를 말한다. 그녀는 로키처럼 뛰어난 복서가 되었고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싸움의 세계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다. 우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 편이 되어 세상을 보지만, 실은 다른 쪽에선 다른 시선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주인공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나. 그녀는 매기 핏제럴드다.(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핏제럴드를 좋아해서, 그 성을 듣기만 해도 아는 사람같은 기분이 든다.) 세계 챔피언전에서 매기는 상대의 반칙 공격으로 넘어져 반신불수가 된다. 호흡기에 의지하여야 살 수 있고 다리도 썩어간다.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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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는 사고가 있기 전 어느 날, 그러니까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트레이너인 프랭키 던에게,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준다. 자기 집에는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뒷다리를 못쓰는 개였다. 자기와 동생은 그 개가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 했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는 개를 데리고 숲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그는 혼자 돌아왔다. 어깨에 삽을 메고 있었다. 매기는 말한다. “아빠와 그 개가, 참 좋았는데...” 이 이야기는 복선(伏線)이다. 매기는 전신불수가 된 뒤 프랭키에게 아빠가 그 개에게 해준 것처럼 자신을 처리해달라고 말한다. 프랭키는 깜짝 놀라면서, 화를 낸다. 난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때 매기는 이렇게 설득한다. “나는 가장 행복한 시절을 만났어요. 내 마음대로 되는 승승장구의 시절이었죠. 그런데 이렇게 내가 오래 있으면 그 행복은 다 잊어버리고, 다시 불행한 기억 만을 채워갈 거예요. 그런 다음 죽는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지금, 가장 좋을 때 죽으면 좋잖아요. 왜 행복하게 죽는 걸 못하게 하세요.”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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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프랭키는 그의 아빠가 되어준다. 그에게서 호흡기를 떼주고, 수면제 주사를 놔준다. 그녀에게 죽음을 주는 일은, 대중이 환호하는 스타 복서로서의 삶을 선물하는 일이다. 행복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 영화 속에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면? 프랭키는 살인자이며, 그의 행위는 권장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일이다. 세상이 권장하는 삶과 선택들은, 인간 개개인의 행복이나 섬세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보다는, 사회 안정이나 생명 시스템 전반의 유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프랭키에게 그 ‘인생 사용설명서’에 나오지 않는 매뉴얼을 준 뒤 그를 실종처리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좋은 죽음’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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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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