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무엇보다도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성장시키며 '학당(學堂)'을 가꾸는 이들이 있었다. 노소와 남녀를 떠나 다만 '학생(學生)'으로 진정한 의미의 학연을 맺은 그들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정진으로써 그 좁은 방을 어느 강당보다 넓은 지식의 전당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그 열기로써 사방 중 봄이 가장 늦게 오는 북촌에서 도리어 가장 일찍 봄을 맞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정신의 새벽을 여는 이들인 것인데, 마침 1500년 전 원효(元曉) 스님을 오늘에 불러와 그 대승의 세계 안에서 서로의 도반이 되려 하고 있었다. 원효라는 이름부터가 새벽이며 깨달음이었듯 하루의 처음을 여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자신이 도시의 효(曉)이며 새벽이었다.
그러니 북촌의 학당에 모인 이들이야말로 이 마을 왼쪽 경복궁 속의 집현전을 잇는 오늘의 학사들이며 오른편 창덕궁 속 규장각을 재건하는 현대의 검서관들이 아니겠는가. 200여년 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죽어버린 조선의 정신사적 맥을 되살리는 다산과 그 벗들의 죽란시사(竹欄詩社)와 같은 결연(結緣)이 아니겠는가.
그런 학연과 결연으로써 비로소 북촌은 복원을 넘어서 보전되며 보전을 넘어서 재생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거기에 과거와 전통의 재생을 넘어서 오늘 서울의 진정한 주인이며 시민의 면모가 있을 터이다. 나들이철 북촌을 찾는다면 고궁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궁궐과 전당을 함께 발견해 보기를.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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