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개나리는 봄에 피는 꽃이 아니다. 겨울에 핀다. 아니 늦가을에도 핀다. 날이 조금만 푹해지면 꽃눈을 돋웠다가 이튿날 추워지면 금방 얼어죽는다. 수백 번, 수천 번 얼어죽은 뒤 비로소 활짝 꽃을 피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봄의 고지에 깃발을 꽂는 꽃이다. 그래서 개나리즘은 투혼이며 개나리는 전사(戰士)이다. 겨울에 핀 개나리눈을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무식하다. 그렇게 시위를 벌이며 폴리스라인을 밀어붙여 봄을 만드는 게 개나리즘이다.
셋째, 개나리는 이름부터 사기꾼이다. 개나리의 ‘개’는 가짜 혹은 허섭쓰레기라는 의미이다. 개눈깔, 개털, 개망신할 때의 ‘개’를 생각하면 적절하리라. 어찌 하여 많은 이름 두고, 평생 나리의 짝퉁 밖에 안되는 개나리인가. 진달래는 태생부터 ‘진짜 달래’인데, 개나리는 어찌 하여 이름구박인가. 나리와 개나리는 전혀 다른 꽃인데, 개나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이게 다, 흔하기 때문이다. 예부터 흔하면 천하다. 귀한 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개나리는 명함을 의식하며 쭈뼛거리는 일이 없다. 그래, 나는 촌 것이다, 어쩔래? 티셔츠 하나만으로도 밍크코트 입은 아줌마보다 빛나는 이십대 초입의 젊은 여인을 생각하면 된다. 이름이 꽃을 환하게 하는 게 아니라, 꽃이 그 개같은 이름마저 환하게 하는 꽃이다. 이름에 의지하지 않는 꽃, 본질이 꽃이며 천성이 꽃인 정신, 그게 개나리즘이다.
넷째, 개나리즘은 떼거리 정신이다. 6.25 때 밀려내려오던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썼지만 개나리는 화해(花海)전술을 쓴다. 물론 개나리도 꽃이니 하나하나 봐도 그리 미울 리는 없지만, 개나리는 온마을을 황화(黃化)하는 거기에 미학이 있다. 문득 숨어있듯 뛰어나오는 요조숙녀같은 한 떨기 꽃이 아니라, 그냥 자식 어마어마하게 퍼질러 무더기로 달려나오는 흥부네같은 꽃이다. 이 떼거리에는 소음이 있고 노래도 있고 슬픔도 있고 애환도 있다. 이 떼거리는 주변의 지저분함을 가리고, 대지의 상처와 가난을 감싼다. 사람이 가난하여 덮지 못한 궁상도 개나리가 가려준다. 그래서 개나리는 몇 송이가 얼어죽어도, 혹은 몇 송이가 짓밟혀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무수한 개나리는 죽어도, 다시 무수한 개나리가 피어나 생명을 잇는 집단미학. 그것이 개나리즘이다.
여섯째, 개나리즘은 치마를 걷어올린 맹렬군단의 정신이다. 우리에게 봄을 파는 것을 허용하라. 수천년 인류 최고(最古)의 직업인 창업(‘娼’業)을 금지하지 말라. 이 노랑 매미들은 칙칙한 거리에서 가장 야한 부위를 가장 높이 내보이면서 시위를 벌인다. 개나리는 수 만개의 알몸 성기(性器)들의 궐기이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이란 한가한 일이다. 그들에게 도덕이란 이념적인 장난일 뿐이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한다. 우린 생존을 위해 봄을 팔 뿐이다. 개나리즘에는 뜻밖에 숭고한 ‘근본주의’가 있다. 개나리는 울지 않는다. 눈물을 믿지 않는다. 벌레 하나가 날아오면 황금빛 성기들이 저마다 오금을 저리며 움직이는 거대한 성욕의 빨판. 그게 개나리즘이다.
일곱째, 개나리는 향기가 없는 꽃이다. 저토록 환한 꽃이 어찌 하여 향기가 없는가. 이 꽃이 인간에게 푸대접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꽃은 인간을 위해서 피는 건 아니다. 인간의 코끝에 아부하기 위해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개나리는 사랑을 부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향기가 없으면 다른 교태로라도 승부를 벌여라. 그것이 개나리 정신이다. 없는 걸 있는 척 하지 말고, 지닌 것을 200% 활용하라. 하느님, 왜 나를 요모양 요꼴로 낳았느냐고 원망하는 건 개나리즘이 아니다. 생긴 대로 태어난 대로, 나름으로는 목숨을 다해 핀다. 향기 좋아하는 것들은 다 꺼지라고 그래. 개나리는 그 빈터에서 남은 잔벌레들을 모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