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음~음~살~보. 나무. 관세음. 음~음. 강. 춘. 봄. 강물. 꽃. 달밤……"
시인이 종이를 든 채로 뜻을 온전히 헤아리기 어려운 단어들을 끊어 읽는다. 중간 중간 해괴한 웃음소리도 발설한다. 어느 새 한 전위예술가가 시인 곁으로 다가가 앉는다. 그리곤 손톱을 깎는다. 깎을 때 마다 스피커에서 확장된 손톱 깨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
이 퍼포먼스는 1981년 5월 27일 열렸던 작품으로, 34년 만에 재연됐다. 지난해 9월부터 미술관으로 바뀐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공간' 사옥 지하 소극장에서다. 그동안 전시실로 쓰이던 '공간 소극장'은 1992년 문을 닫은 후 이날 재개관하게 됐다. 1980년대까지 실험적이고 다양한 문화예술의 산실 역할을 했던 소극장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나가자는 많은 이들의 바람이 있어서였다.
창덕궁과 현대그룹 사옥 사이에 자리한 옛 공간 사옥은 1977년 한국1세대 건축가 김수근씨가 지은 건물로, 설계사무소 겸 전시·공연이 이뤄졌던 곳이었다. 당시 예술종합지 '공간'의 편집장이었던 조 시인은 "그 시절 소극장에서 시 낭독, 전통·현대 무용, 타악기 연주, 판소리, 연극, 마임, 인형극, 퍼포먼스 등 여러 장르의 공연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런데 '사장'이라고 불리기를 아주 싫어했던 김 건축가가 타계한 후엔 '공간'안에서 예술에 대한 열의가 점차 사라졌다"며 "작년에 미술관으로 재개관한 옛 '공간'의 소극장을 다시 살리자는 뜻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전위예술 선구자로 불리는 김 작가도 과거 '공간'을 자주 들락거렸다. '손톱과 시'라는 퍼포먼스 역시 '공간'에서 만났던 이들과의 합작품이었다. 당시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초청된 김 작가가 어떤 작품을 만들지 고민을 나눴고, 그 결과물을 '공간 소극장'에서 초연했던 것. 그러나 정작 여러 가지 이유로 상파울루에서는 이 작품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한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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