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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편지, 그 느린 연애의 기억(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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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해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유치환의 "행복" 앞부분>


청마의 이 시는 아련한 옛날 방식의 사랑으로 우릴 데려가준다. 이 시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청마가 "석굴암 대불" "바위" "수首" 따위의 장쾌하고 남성적인 작품을 쓴 시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애잔하고 섬세한 감정의 일렁임이 우체국이라는 배경화면 위에 아름다운 옛 영화 한편처럼 다가온다. 이 감미로운 애상을 자아내는 대부분의 힘은, 편지라고 하는 구식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있다는 것을 금방 짐작하리라. 지금의 전자메일이라면 단 십초도 안걸려 보내고 싶은 이의 안방 책상머리에 도착할 소식을, 며칠에 걸쳐 보내는 편지. 그게 뭐 그리 오래된 얘기였던가? 인터넷은 그나마 편지씀씀이에 게을러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펜을 놓게 만든 결정타였다. 게다가 휴대폰이 등장하여 그 많은 시간차를 견디며 기다리고 기다려야 했던 편지를 확인사살하고 말았다.
오랫 동안 인류의 전령사 노릇을 해온 편지가 사라진 것은,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해온 아름다운 역할을 기억해서 언제까지나 그 느린 걸음걸이를 고집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할 지 모른다. 그것에 대해 아쉬움이 생기고 그것에 대한 추억들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 상황들은, 이미 편지에 내려진 사형선고나 임종을 증명하는 정황증거들인지도 모른다. 최진실이 나오는 영화 "편지"를 보고 펑펑 울어대는 소녀들과 일본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뺨에 흐른 물기를 손수건으로 찍어낸 아줌마들은 이미 편지라는 향수상품을 훌륭히 맛본 케이스리라. 그렇다고 그 감동을 못잊어, 그들이 전자메일을 포기하고 핸드폰을 끄고, 당장 분홍 꽃편지지를 꺼내 그리운 사람에게 빼곡히 사연을 적어 내려갈까?

편지가 꽤나 달콤한 향수상품이 된 것은, 그것이 사랑을 중개하는 메신저였던 데도 한 원인이 있으리라. 편지는 그 느림보전달이라는 특징 때문에 사랑을 더욱 감미롭게 예열하고 또 상상 속에서 증폭하고 오래오래 긴 여운으로 간직하게 하여왔다. 밤을 새워 편지를 써본 기억이 있으리라. 쓰고는 마음에 안들어 찢고, 다시 쓰고...재떨이엔 담배꽁초가 가득 차고...휴지통엔 쓰다버린 편지지가 구겨진 채 가득 쌓여있는 풍경을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쓴 글귀들이 받는 사람에겐 어떤 뉘앙스로 다가갈까? 상대가 읽어보기 전에 치밀하게 중간점검하는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한때는 볼펜 글씨가 성의없다고 잉크에 펜을 찍어 한자 한자 정성껏 써나가지 않았던가? 한 글자 한 낱말이 예술이며 쓰는 이의 혼이었다. 남들은 잘도 쑥쑥 뽑아내는 아름다운 언어들이, 왜 내 머리 속에선 뱅뱅 맴돌며 떠오르지 않는 걸까? 사랑은 이렇게 그립고 절박한 무늬를 이루며 편지지 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밤을 꼬박 새워 쓴 연서 몇장을 꼬옥꼭 접어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고 주소를 쓰고,그리고 우체통으로 달려간다.

우체통이란 얼마나 반가운 물건이었던가? 체신부 마크가 찍힌 빨간 통 안에는 얼마나 많은 정성과 마음들이 쌓여있었던가? 시내와 시외로 나눠져 있는 두개의 투입구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며 혹시 잘못 들어갈까 조바심을 내며 봉투를 쏙 밀어넣는다. 편지가 우체통 속으로 톡 떨어지는 소리. 그 흥분을 기억하는가? 편지를 넣고난 뒤에도 뭔가 할 일이 남은 것처럼 느껴져 그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댔던 기억들은 없는가? 겨우 이제 편지는 출발했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가슴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하던 것은 단순한 성급함이었을까? 이렇게 나의 언어가 출발한 날로부터 나는 손꼽기 시작했다. 지금쯤 그 사람에게 도착했을까? 얼마쯤 걸릴까? 사흘? 나흘? 그녀는 내 편지를 받고 놀라겠지? 아마 감동했을 지도 몰라. 당황하진 않았을까? 답장을 써줄까? 사흘쯤은 망설이겠지? 그러면 도착하려면 열흘? 보름? 그렇게 이런저런 상상을 보태고 시간을 계산해가는 동안 하염없이 세월은 흐른다. 그러는 동안 그녀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불타올라 편지가 유턴해오는 때 쯤이면 어김없이 신열에 들떠있다.

청마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행복하다고 다짐하듯 말했지만, 그 말은 뒤집어서 듣는 것이 현명할 지 모른다. 사실 사랑을 주는 일은 힘겹고 쓸쓸하고 대책없고 그저 참는 일이 전부일 뿐이다. 언젠가 그도 내 마음을 알아주리란 기대 만으로 현재의 냉담을 견뎌야 하거나, 그것도 기대하기 힘들 땐 그저 내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스스로 자위해야 한다. 그게 뭐가 행복한가? 청마가 이런 시를 썼을 땐, 많은 사람들이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을 더 원하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청마의 역설은, 사랑은 역시 받는 것이 달콤하고 행복하다는 세속적 관점에 대한 확인이다. 주고받음이 동시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게 안될 경우엔, 이왕이면 받는 사랑이 더욱 살맛난다. 사랑을 주어왔던 사람이 언젠가 그것을 철회하게 될 때의 아쉬움이나 상심을 미리 상정하고 경계하는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게 무서워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주는 사랑은 안 그러랴? 지금 당장도 딱히 그가 절망적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 또한 지치고 힘겨워 포기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랴? 장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에는 끝이 있다고. 그러니 청마에겐 실례지만 받는 사랑이 더 행복하다는 점을 인정하기 바란다. 그런데 청마가 표현한 사랑이란 말은 편지에도 아마 적용되는 말일 지 모른다. 청마는 받는 편지보다는 주는 편지가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지 모른다. 그럴 듯한 얘기다. 편지를 쓰는 날들의 아름다운 마음.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과정을 이루는 감미로운 바탕일 지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청마의 말에 딴죽을 걸고 싶어진다. 편지 또한 받는 게 더 행복했다고. 그녀의 글자들. 또박 또박 적어내려간 글자들. 문장들. 표현들. 비유들. 내 첫사랑의 주춧돌을 이루던 그녀의 편지 속에 들어있는 낱말의 천국은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금방 몇 귀절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어느 날 동봉했던 그녀의 사진 두장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던가? 그 사진과 편지들은 언제나 내 가장 중요한 서랍 속에 소중히 보관된 채 청춘의 변화많은 날들에 감미로운 위로가 되어왔다. 내 아내를 가장 격앙케했던 연적戀敵 또한 가득히 쌓인 편지들이었다. 아내의 상심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녀의 연적들 혹은 나의 오래된 연인들을,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으로 귀양보내야 했다. 그러나 아내의 질투심도 내 마음 속의 우체통은 완전히 비우지 못했다. 내 머릿 속을 맴도는 연서의 몇 귀절은 수십년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물론 행복한 사랑편지만이 편지의 전부는 아니다. 외로움과 뉘우침과 걱정과 안타까움을 함께 했던 것도 편지였다. 오히려 그런 날들에 만났던 편지들은 얼마나 반가운 우군友軍이었던가? 청마는 또다른 편지에 관한 시를 남기고 있다.

-너의 편지에
창 밖의 저 바람소리마저
함께 봉하여 보낸다던 그 바람소리
잠결에도 외로와 깨어 이 한밤을 듣는다

알 수 없는 먼먼데서 한사코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달려와
또 어디론지 만 리나 날 이끌고 가는
고독한 저 소리!

너 또한 잠 못 이루는 대로 아득히 생각
이 한밤을 꼬박이 뜨고 밝히는가.

<유치환의 "밤바람"에서>


전깃불이 들어오던 날에 밤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 어둠이라는 신비하고 놀라운 세상에 대한 꿈들이 쪼그라들고 말았듯이, 전화와 통신의 발달은 편지의 꿈과 낭만과 사유와 상상력들을 일거에 몰아내버리고 말았다. 바람소리를 동봉하는 저 편지의 낭만이 이메일 어느 쪼가리에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그 바람소리를 부쳐받고, 자연에다가 다시 풀어내어 그 바람소리 들릴 때마다 외롭고 그립고 애절한 마음을 달래는 스케일을 어찌 달팽이 아닌 광케이블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통신수단도 느렸지만 교통수단도 느린 때였으니, 한번 찾아가보기도 어려운 사람. 오로지 편지라는 수단 만이 둘 사이에 깜박이는 인연의 촛불처럼 피어올라있는 유일한 큐핏이었다. 편지의 이쪽과 저쪽의 사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고, 또 그 정보를 보완할 만한 어떤 수단도 없었던 시대에, 편지는 유일한 단서였다. 사실의 그림으로 잘 그려지지 않는 일들의 대부분은 상상으로 메꿔야 했다. 그러니 편지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상상을 촉발하는 방아쇠들이었다. 편지가 사라진 뒤 그 풍성하던 인간의 상상력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옛사랑이 은근하게 에두르며 천천히 커져가는 사랑이 많았던 것도 이런 통신의 낙후성 때문인 점도 있다. 그래도 한번 붙으면 아주 뜨겁고 평생을 가는 사랑이 되는 이유도 편지와 같은 감질나는 매개물들의 조화였는지 모른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리움은 차일피일 길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랑 또한 그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예열기간이 긴 사랑이었는데, 어찌 그걸 쉽게 내던지거나 등돌릴 수 있겠는가?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못했을 일이다. 인연이란 말이 지금보다 그때 더 중요했던 까닭도, 한번 맺어지기가 이리 힘든, 통신기술의 원시성등 기술적인 요인들에 있다면 내가 너무 인간관계를 폄하하는 걸까? 사랑의 발효과정이 생략된 요즘의 만남이 헤퍼지고 어지러워지고 또 급랭하기 쉬워진 것은, 이메일과 핸드폰이 가져다준 재앙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번호만 찍으면 자는 사람도 깨어 이어주는 스마트폰이 설치고 땅 속으로 숨어도 전파를 쏴서 찾아내고 빤스만 입고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밤새도록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할 수 있는 SNS 속의 징그럽도록 편한 글놀이가 있는데 무슨 청승으로 손가락 아프게 해가며 종이에 지렁이를 그리고 앉았겠는가?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얄궂고 신기하게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오늘 아침 아파트 앞을 산책하다가 빨간 우체통 하나를 보았다. 아아, 저런 게 아직 있었구나. 그 동안에도 줄곧 저 위치에서 비바람햇빛을 모두 맞고 있었으련만 내눈에 저게 이제야 눈에 띄니 신기하다. 나의 무심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문득 생각한다. 요즘도 편지 보내는 사람이 있나? 우체부가 저걸 매일 열어볼까? 아참. 요즘엔 홍보 쪽지나 전단 쪼가리들이 많다던데?

옛날엔 신주단주 바라보듯 했던 우체통을, 이젠 박물관 금관 바라보듯이 본다. 내 그리움들에 배가 불룩해있는 것 같았던 저 통안에, 이젠 소화불량의 쓰레기들만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어둡다. 내가 쓴 편지들이 저 통 속에서 기다리고 있고, 또 내게 올 편지들이 다시 저 통 속을 채우던 그 날들의 나는, 느릿한 전율들로 환한 사랑에 함몰되어 있었다. 구식사랑이었다. 지금 피자가게 광고지와 카드대금 영수증 따위의 우편물들로 가득찬 우체통은 나의 사랑을 밀어낸 위대한 과학과 기술의 힘일까? 아름다운 편지세상을 함락당한 나는 통신 속으로 쫓겨들어와 자판을 두들기면서 허황한 커서의 깜박이를 열심히 밀어내며 쓸쓸한 퇴주退走를 보상하고 있는 것일까? 접속만 하면 와르르 쏟아지는 몇 통의 편지들 중, 그 옛날의 설렘과 반가움을 담은 것이 몇통이나 있었던가? 옛날보다 많고 잦아지고 빨라지긴 하였지만 그것이 편지가 거느렸던 수많은 부대감정까지를 이끌고 오진 못했다. 쉽게 씌어진 것들이기에 기억 속에서도 쉽게 지워지고 만다.

어쨌든 사라진 놈을 붙들고 호곡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매일매일 수십통씩 읽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싸구려편지들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싸구려편지를 쓰는 많은 사람들이 십년 전엔 낡은 연애와 느림보 편지질을 하던 당사자들이 아니었던가? 얄궂다. 우리가 왜 이러지? 마음 속 깊이 걱정들을 하면서도 우린 느린 연애의 옛 애인들에게, 광속光速으로 전달되는 긴박한 편지를 쏘아보낸다. 그리움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메시지를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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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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