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금융실명제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뭉칫돈이 은행에서 사라지고 있다.
5만원권의 퇴장(退藏)현상도 심상치 않다. 2012년 61.7%에 이르던 한국은행의 5만원권 환수율은 올해 1~9월 24.4%로 급감했다. 특히 지난 7~9월 발행된 4조9400억원의 환수율은 19.9%에 그쳐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200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 24일 한국은행 거시건전성분석국은 '실물 및 금융 사이클을 감안한 통화정책과 거시건전성정책 운용' 보고서를 통해 실물 경제가 침체 국면이면서 통화량이 늘어 금융 사이클이 팽창하는 상황이라면 통화정책은 확장적(기준금리인하)으로,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거시건전성정책은 긴축적으로 운용하는 정책 간 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 전문가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 난해한 언사는 결국 금융의 경기순응이론과는 달리 서로 유리(遊離)되어 움직이는 작금의 금융과 실물이 모두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는 고백이자 사후 약방문이다.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춘 금리에도 소비와 투자심리는 개선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디플레이션 공포'는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다가오고 있고, '빚내서 집 사라'는 황당한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1060조원을 돌파한 가계부채는 긴박하게 울리는 경고음에도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논어에 "자로가 귀신 섬김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으랴?'라 하고, 죽음에 대해 묻자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라 하였는데 사변적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인(仁)을 실천하려는 공자의 사상이 담겨 있다.
지지부진한 규제개혁을 참다 못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낡은 규제도 단두대에 올려 혁명을 이루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부디 이 과격한 발언이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깊고 긴 불황에 부박(浮薄)한 삶을 이어가는 국민들의 실물적 근거를 복원하려는 의지의 표명이기를 바란다. 실물이 희망이다.
정병선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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