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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시진핑 열전]아베 신조, '혀 짧은 도련님' 콤플렉스 딛고 매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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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격동 한국외교의 Key-man 아베 & 시진핑]아베 신조가 살아온 길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 2002년 일본 관방부장관이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자민당 간사장 대리의 자격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의 북한행에 동행한다.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던 당시 북일 정상회담에서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일본인 납북 사실을 부정해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공작원이 13명을 납치해 8명이 죽고 5명이 살아 있다"고 밝힌 것이다. 협상 당시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초강수를 제안했다. 북한이 사과를 하지 않으면 방북의 목적이었던 북일 공동성명 없이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아베의 강경책을 받아들여 북한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같은 강수는 의외의 성과를 내 김 위원장의 사과를 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외교적 성과로 아베는 일본 국민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이익을 위해 제 목소리를 내는 이미지는 아베가 총리로 발돋움하는 데 가장 큰 자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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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는 일본 정치사에서 새로운 기록 몇 가지를 갖고 있다. 전후 취임한 총리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2006년 당시 52세)에 총리가 됐을 뿐 아니라 1948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 이후 처음으로 총리에서 물러난 뒤 다시 총리가 된 정치이력을 가지고 있다. 요시다 전 총리의 경우 전후 혼란기 속에서 정권을 잠시 내려놨다 다시 총리가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7년 사임했다 2012년 오뚝이처럼 화려하게 복귀한 아베의 삶은 여느 정치인의 삶과 다르다. 이 같은 기록들은 '매파', '강경보수' 등으로 주변국들로부터 비판받는 아베 총리가 정작 일본인들로부터는 큰 기대를 얻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종종 스스로를 '싸우는 정치인'으로 소개한다. 일본과 일본국민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혀가 짧고 말이 빨라 연설에 어려움이 많은 데다 스트레스에도 약해 자주 배앓이를 하는 등 대중정치인으로서 약점이 많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언제든 싸우겠다"는 전의를 밝히며 오늘날 일본을 이끌고 있다. 정치인 아베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오른쪽)의 52세 생일을 축하하는 어린시절 아베.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오른쪽)의 52세 생일을 축하하는 어린시절 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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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명문가의 도련님= 아베 총리의 집안은 지역구를 아들 또는 사위에게 물려주는 것이 일상화된 일본에서도 독보적인 정치 명문가로 꼽힌다. 전후 일본 정치ㆍ경제의 초석을 세운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는 그의 외할아버지다.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전후 최장수 총리이기도 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외종조부(사토 전 총리는 기시 전 총리의 친동생이다)다. 친가쪽도 만만치 않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역시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외무상 등에 올랐으며 차기 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베가 태어나기 한참 전, 젊은 나이로 요절한 친할아버지 아베 간(安倍寬)은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베 총리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도쿄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아베 간은 진보적 정치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주도해 A급 전범으로 처형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 맞섰던 평화주의자였다. 반면 외할아버지인 기시 전 총리는 관료로 출발해 도죠의 전시 내각에 참여해 A급 전범으로 처형될 뻔 했던 인물로, 전후에는 보수성향의 자민당을 창당하는 등 일본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힌다. 아베 간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남에 따라 아베 신타로는 장인인 기시의 보살핌 속에서 정치인이 됐다. 할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베 신조도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다.
떡볶이 코트 입고(오른쪽)  포즈 취하는 청년 아베

떡볶이 코트 입고(오른쪽) 포즈 취하는 청년 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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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비서로 정치 입문=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태어난 아베는 어린 시절부터 도쿄에서 자랐다. 세이케이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아베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공부하다 중도에 그만두고 고베제강소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2년간 일한 뒤 아버지 외무장관을 지냈던 아버지의 비서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자녀를 비서관으로 채용해 정치세습 준비를 하는데, 아베 총리 역시 같은 경로를 밟았다. 아베는 비서관으로 있는 동안 비서 업무를 맡기보다는 주변 보좌진 등을 통해 정무감각 등을 익히는 데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1991년 아베 신타로가 사망한 뒤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공식적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치입문 초기에는 '옷 잘 입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채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베가 전국구 스타로 부상한 것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 해결 노력 덕분이다. 그는 일본내 강경 입장을 주도하면서 일본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베는 1997년 요코다 메구미(田めぐみ) 가족을 중심으로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가 만들어지자 동료 의원들과 함께 '북한 납치의혹 일본인 구조 의원연맹'을 결성하며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일 정상회담 뒤, 북한은 귀환을 전제로 생존자 5명의 일본 방문을 허락했다. 이들이 일본에 돌아오자 일본사회에서는 다시 이들을 북한에 돌려보낼 지를 두고서 새로운 논란이 벌어졌다. 북일관계를 생각해 돌려보내야 한다는 입장과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맞선 것이다. 아베는 이 때에도 고이즈미 총리에게 5명을 돌려보내지 말 것을 촉구했다. 만약 북한이 반발한다면 경제제재 등으로 맞서자고 설득한 것이다. 이번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아베의 제안을 받아들여 5명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고 일본에 잔류시켰다. 납북자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아베는 스타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거리 유세 나선 정치인 아베.

거리 유세 나선 정치인 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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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몰락, 그리고 재기= 2006년 아베를 총리로 만든 데에는 북한의 역할이 컸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계속되자 일본인들의 안보 불안은 커졌다. 대북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아베의 인기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해 9월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의 후계자가 돼 자민당 총재를 거쳐 총리에 오른다.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아베 정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007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당이 연금 기록의 부실 관리를 문제삼기 시작한 이후 2007년 5월 납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후생연금과 국민연금이 5095만건에 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이어 현역 농림수산부 장관이었던 마쓰오카 도시카쓰(松岡利勝)가 금전 스캔들로 자살했다. 6월에는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장관이 "(2차 대전중)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의 발언을 해 새로운 파문을 일으켰다. 발언의 책임을 지고 규마 방위장관은 사임했지만 내각 지지율을 뚝 떨어졌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뒤, 마쓰오카의 후임인 아카기 노리히코(赤城德彦) 농수산상마저 스캔들로 사임했다. 뒤이어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연장안이 야당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자 아베 총리는 정국 운영능력을 상실했다. 급기야 궤양성 대장염으로 건강까지 악화된 그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총리에서 물러났다. 취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못한 때였다.

아베는 2012년 11월 총선에서 자민당을 대승으로 이끈 뒤 총리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잊혀질 뻔한 그를 구한 것은 이번에도 주변국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중국과 일본 간의 영토 갈등이 이어지면서 일본 내에서 '싸우는 정치인' 아베를 찾는 목소리가 커졌다. 아베가 이전 선거에서는 안보 관련 이슈만으로 인기몰이를 했다면, 이번에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까지 일본인들에게 먹혔다. 선거 결과, 자민당이 중의원 480석 가운데 294석, 우익신당 일본유신회가 54석을 차지하는 등 보수세력의 압승이었다. 반면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은 57석에 불과한 수준으로 무너졌다. 아베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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