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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비판하다 잡혀간다? 실제 ‘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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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폐지 ‘국가모독죄’, 외국언론 보도통제 수단…檢, 비판여론 다시 옥죄기?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한때는 대통령 비판(비난)이 국민놀이(?)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뚜렷한 근거가 없어도 어떤 사안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대통령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늦게 켜져도 “이게 다 대통령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볼 때 대통령 비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던 시절은 참여정부 임기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때는 대통령을 비판하고 때로는 모욕한다고 해서 죄가 되거나 잡혀갈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는 ‘국가원수모독죄’로 불렸던 무시무시한 법이 있었다. 대통령 욕을 하다가는 잡혀갈 수 있다는 얘기의 배경이 됐던 그 법안이다.

흔히 ‘국가원수모독죄’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죄는 없었고 ‘국가모독죄’가 정확한 명칭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5년 3월25일 형법 제104조 2(국가모독 등)가 만들어졌다.
형법 제104조 2의 1항은 ‘내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대한민국의 안전·이익 또는 위신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게 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고 돼 있다.

형법 제104조 2의 2항은 ‘내국인이 외국인이나 외국단체 등을 이용하여 국내에서 전항의 행위를 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고 돼 있다.

대통령을 욕하다가 잡혀갈 수 있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대통령 모독죄, 국가원수 모독죄로 불리기도 했던 형법 104조 2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만들어졌고, 대통령 비판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대통령 비판하다 잡혀간다? 실제 ‘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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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실제로 ‘국가모독죄’를 적용해 기소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이 처음이다. 국가모독죄를 대표적인 ‘5공 악법’ 중 하나로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청년연합회 김철기 총무는 1982년 7월 외국기자들에게 반정부 유인물을 돌렸다는 혐의로 국가모독죄를 적용받아 기소됐다.

김 총무는 1982년 7월23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 청년연합회 사무실에서 일본 교도 통신 기자 등 10여명의 외신기자를 초청해 유인물 300여장을 나눠준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지만, 2심은 “국가모독죄가 성립되려면 내국인이 외국인을 이용하는 행위와 이용당한 외국인이 국외에서 대한민국 및 그 헌법기관을 비방하는 행위가 실제로 있어야 한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83년 6월 “정부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외국인에게 나눠준 행위자체가 국가의 안전 이익 또는 위신을 해쳤거나 해칠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2심 판결을 깨고 유죄 취지로 돌려보냈다.

당시 이회창 대법관(전 한나라당 총재)은 소수 의견으로 무죄를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외국인에게 유인물을 배포한 것만으로는 모독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결론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관 다수 의견은 국가모독죄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단했다. 결국 김 총무는 1983년 12월 재항소심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국가모독죄는 대통령 모욕이나 비방에 대한 처벌의 의미도 있었지만, 외국언론에 대한 보도 통제 의미도 담겨 있다. 국가모독죄로 기소돼 대법원 판례가 나온 두 사건(1983년, 1986년 사건) 모두 외국 언론을 상대로 한 의견표명이 혐의 적용의 이유였다.

대법원은 1986년 8월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황인하 총무부장에 대한 국가모독죄 위반 혐의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국가기관인 대통령을 모욕 또는 비방하고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대한민국의 안전, 이익 및 위신을 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범죄구성요건을 충족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민청련에서 외신기자 회견을 열어 방미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면 성명서 배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국가모독죄 공동정범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국가모독죄는 외국언론을 상대로 국내 상황을 전하는 행위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고, 대법원도 그러한 논리에 법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국가모독죄 적용 대상은 일반인은 물론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찰은 1987년 5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취임사와 관련해 ‘국가모독죄’ 적용을 검토하기도 했다. 국가모독죄는 국민의 합리적인 비판을 옥죄는 수단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88년 12월 형법에서 사라지는 운명에 처했다.

국회 ‘민주발전을 위한 법률개폐특위’는 1988년 7월 대표적인 ‘5공 악법’ 중 하나로 불렸던 국가모독죄를 폐지하기로 결의했고, 이후 국회에서 폐지안이 통과됐다. 결국 1988년 12월 31일 국가모독죄를 적용한 형법 제104조 2는 삭제됐다.

법원의 한 판사는 “흔히 국가원수모독죄로 알고 있는 국가모독죄는 1988년 12월 폐지돼 형법에 관련 조항이 없다. 지금은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등의 행위가 있을 경우 모욕죄나 명예훼손죄가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모독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국가원수모독죄(대통령 모독죄)’로 불렸던 해당 법은 사람들의 뇌리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한동안 대통령을 비판하다가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물론 세상은 바뀌었다. 국가모독죄 혐의 적용 대상으로 거론되던 김영삼 전 총재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이후 정권교체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 비해 비판의 자유가 확대된 것은 분명하지만 ‘국가모독죄’의 어두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검찰은 대통령이 ‘사이버 단속’을 지시한지 이틀 만에 ‘유관기관 대책회의’를 열고 엄정 대응 의지를 밝혔다. 검찰의 명분은 인터넷상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단속이었다. 하지만 검찰 대응은 포털업체의 상시적인 모니터링 강화와 허위사실 게시물 즉시 삭제 조치 등 ‘여론 통제’ 논란으로 번졌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인 오영중 변호사는 “검찰이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수사하겠다고 하는데 국민의 비판여론을 압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면서 “비판여론을 검찰의 힘으로 막겠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처사로 국가권력의 남용”이라고 비판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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