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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전쟁으로" 타인을 적으로 보는 광기社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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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폭력사건…"교육에 뭔가 문제있다"

[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 '윤 일병 사망 사건'과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 등 잔혹한 집단폭력 실태가 연이어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장소만 다를 뿐 '학교'와 '군대'라는 우리 사회의 조직문화를 대표하는 곳들에서 이런 참혹한 일들이 벌어진 데 대해, 일상에 도사린 잠재된 폭력성의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예방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정→학교→군대→회사'로 이어지는 조직사회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개인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점차 왜곡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정에서 1차적인 보살핌과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채 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교에서도 이러한 학생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도와줄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으니 성장기에 이미 '타인은 적'이라는 의식이 내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감정'이라는 속성을 집단에 적용해 사회 현상을 분석해온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기본적으로 폭력은 '공포'가 만연한 사회에서 발생한다"며 "타인으로부터 사랑이나 협동, 연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 '타인은 적'이라는 의식이 내면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특정한 공간에 모이게 되면 '적의 공격'이 이뤄지기 전에 내가 먼저 공격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의 교사들도 최근 학생들에게 비치는 폭력성과 관련해 이와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서울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이모(37)씨는 "최근 일어난 사건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폭력성이 내재돼 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다"며 "한 학급에서 특정 학생을 지목해 인신공격을 하거나 헛소문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고, 사이버공간을 이용한 이른바 '신상 털기'도 흔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다수와 다르거나 약점이 있는 아이를 (집단적으로) 괴롭히면서 일종의 '안심', 다시 말해 '나는 너보다 강하고 너는 나의 적이 될 수 없다'는 위안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 공교육 현장에서 폭력예방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해지고 학창시절 경험한 폭력이 성인이 돼서도 조직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문제의식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감대가 형성돼왔다. 서울의 경우 월 1회 이상 폭력예방 교육을 실시하도록 시교육청이 각 학교에 지침을 내리고 있으며 외부강사나 동영상, 자료집 등을 통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또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정모(40)씨는 "성교육, 나라사랑교육 등 여타 비교과 의무교육 등과 번갈아 실시돼 학생들이 '때 되면 돌아오는' 수업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라며 "이런 식의 교육이 학생들의 근본적인 의식 개선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학교에서부터 폭력의 '싹'이 끊임없이 움트고 있는 데 비해 교육당국의 대처 역시 표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학교생활교육과 관계자는 "월 1회 이뤄지는 교육은 자율적 사항이라 따로 이행 여부를 보고받지는 않는다"며 "강제성이 없어도 대체로 잘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시교육청은 학교에서 폭력과 관련한 사안이 실제로 발생을 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행정처분에 들어가는 정도로 관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일시적인 '계도'에 의한 교육으로는 이렇게 끔찍한 폭력 사건을 근본적으로 예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데 전문가와 현장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주고 학업 이외의 성취 경험을 맛보기 어려운 교육제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 교수는 "누구에게나 타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만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며 "공부뿐 아니라 예술이나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를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한국 교육의 시스템에서 공부 이외에는 그런 장(場)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폭력'밖에 남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암묵적으로 일상의 폭력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물리적인 힘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동의, 조직의 질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자녀 교육을 위해' '면학 분위기를 위해' '군대의 기강을 위해' 어느 정도의 체벌이나 얼차려 등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어떤 문제를 '강제로' 또는 '밀어붙여서' 해결하려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신 교수는 지적한다. 그는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가시적으로 빨리 해결하려고만 하고 인격, 인권, 넓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뒤로 미뤄지는 일이 반복되면 이런 극단적인 사례로 표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부터,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의 의식 변화, 국가와 행정조직문화에 이르기까지 민주적인 태도와 절차가 뿌리내릴 수 있는 아주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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