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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서재에서]一水去士 남재희, 1만권 서재가 평생직장

최종수정 2014.07.03 14:51 기사입력 2014.07.0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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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50만원 들고 청계천변 책낚시
월척 희열 맛보려 집 몇채는 날렸지
의대시절 배운 영어ㆍ독어 덕에
책은 원서로 읽어, 그 맛이 살잖아
집에 책밖에 없어, 네 딸도 책만 읽었지
고은ㆍ김수영 등 글벗이 다 술벗이야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고은 시인은 전작시 <만인보>의 '남재희'편에서 "의식은 야(野)에 있으나 / 현실은 여(與)에 있었다. / 꿈은 진보에 있으나 /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 술 취해 집에 돌아가면 / 3만권의 책이 있었다. / 법과 대학 동기인 / 아내와 /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고 읊었다.

남재희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기인이자 대인이다.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해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등을 거치며 불과 기자밥 7년차에 문화부장(조선일보)을 지냈고 불과 38세이던 197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4선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하고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행정가이기도 하다. 여러 권의 책을 낸 문필가이자 8순을 넘긴 오늘날에도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는 명칼럼리스트이기도하다. 하지만 그는 지식인들 사이에선 장서가이자, 다독가, 그리고 풍류를 아는 호주가로도 알려져 있다.

거의 매년 매월 50여만원어치 이상의 책을 구입해 온 그의 서울 신정동 2층짜리 단독주택은 한때 6만여권의 서책으로 도서관을 방불케 했으나 몇 년 전 대학에 대부분을 기증하고 현재는 1만여권만 남아 있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20년은 언론인으로, 20년은 정치인으로, 20년은 정치관찰자'로 살고 있는 남재희씨는 '일수거사(一水去士, 한물 간사람)'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으나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책과 인생에 대해 강제 인터뷰했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했습니까.

▶어릴 적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지. 대학시절에도 전공서적은 물론 다방면의 책을 섭렵했고.

-그 많은 책을 어떻게 구입하셨습니까.

▶난 주로 헌책방을 이용했어. 왜냐고? 책값이 싸잖아. 신문사 근무 시절엔 매일 점심 때면 청계천변을 걸어서 헌책방을 들렀다 오곤 했지. 산보겸 헌책방 순례가 나중엔 습관이 돼 버리더라고. 헌책방을 자주 찾다 보니 차츰 양서를 찾아내는 안목이 생기더구만. 헌책방 순례는 일종의 낚시나 다름없는데 가끔 월척이 걸리곤 했지. 매월 책값으로만 50여만원을 날린 셈인데 그걸 다 모았다면 집을 몇 채 샀을거야.(그는 지금도 매주 한 번 정도는 홍익대 앞 온고당이라는 헌책방에 들러 여전히 책을 낚시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독서는 주로 어떤 식으로 하십니까.

▶기자깡패, 정치깡패 하느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 그런 면에서 난 컬렉션을 즐기는 장서가인 셈이지. 참 그리고 난 책을 주로 원서로 읽어. 번역서는 책의 내용이나 미묘한 뉘앙스가 잘 안 들어와. 요즘에야 좋은 번역가들이 많아서 번역도 잘 하더라만 과거엔 영미 원서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중역본이 많아서 번역서가 싫었어.(그가 단지 장서가일 뿐이라고 겸손해하지만 실제로 그는 유명한 다독가이다. 그의 글을 보면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독서편력의 이력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외국어는 어느 정도 하십니까.

▶4개 국어 정도는 하지. 의대를 다닌 덕에 영어, 독일어, 불어, 라틴어를 배웠는데 영어, 독일어는 엄청 잘했지. 나중에 하버드대 니만펠로를 다녀오며 영어는 더 친숙해졌고. 특히 영어는 고등학교 때 시골장터에서 토머스 울프의 <시간과 강>이라는 두툼한 영문소설 한 권을 구했는데 여름방학 내내 사전과 씨름하며 소설 한 권을 뗐더니 영어에 새로운 눈이 떠지더라고. 일종의 파겁(破怯)을 한 거지.

-의대를 다니다 법대로 전공을 바꾸었는데요.

▶일종의 객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 (본인은 부인하지만 원래 의대를 다니다 '정신이 병든 민족은 육체가 아무리 건장해도 멸망한다'며 중간에 문필가로 전향한 루쉰(魯迅)을 사표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고시공부는 안 했습니까.

▶하긴 했지. 헌데 중간에 어쩔 수 없이 관뒀지. 1957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친아들인 이강석의 서울대 부정편입학 사건에 반대해 동맹휴학이 있었는데 학생총회 의장이었던 내가 앞장서 이를 주동했지. 그 바람에 요주의 인물이 됐는데 이런 상황을 감안해 신변보호 차원에서 신문기자가 된 거지.

-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인류의 지적 작업의 결정체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 결정체인 진액을 손쉽게 먹는 것이나 다름없어.

-네 명의 딸들을 다 잘 키우셨는데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지요.

▶다들 자기들이 알아서 잘 자라줬지만, 집안 구석구석마다 쌓인 책들을 보고 자란 영향도 있었겠지. 가장 좋은 육아법은 부모가 자식들 앞에서 솔선수범해 책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해.

-5공화국 시절에 골수 학생운동권이었던 두 딸 때문에 곡절이 많았겠습니다.

▶고생 좀 했지. 1981년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이던 큰 애가 동료학생 서너 명과 함께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군사정부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구속됐고, 1년후에는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둘째딸이 시위 배후조종혐의로 성북경찰서에 붙잡혀갔지. 큰 애 사건은 전두환 정부 들어서 여당인 민정당 소속 의원 자녀가 반정부활동을 하다 걸린 첫 케이스였어. 미련 없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는데 전 대통령이 "선거에 바빠 자녀를 잘 챙겼겠냐"며 반려하더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둘째는 당시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씨의 최측근이던 재야인사 예춘호씨의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것 아닌가. 청와대 정무수석을 통해 '죄송하게 됐다'는 뜻을 전 대통령에게 전했는데 전 대통령은 "정치와 결혼은 별개 아닌가"라며 도리어 축의금까지 보내왔어.(이 대목에서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 딸들은 지금 뭐 하십니까.

▶큰애(화숙)는 유학 가서 현재 미국 워싱턴대학 교수로 있고 둘째(영숙)는 외교부에 있다가 이화여대 교수로 옮겼어. 셋째(관숙)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스탠퍼드대학에서 컴퓨터공학 석사를 했는데 자유분방한 애비를 닮았는지 프리랜서로 출판기획 및 번역 일을 하고 있어.

-독서편력을 보니 진보적 서적들이 많던데요.

▶내가 진보적 성향의 영어잡지나 서평책들을 많이 본 것은 사실이지. 일본책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난 일본 좌익서적을 안 봤어. 일본 세까이(世界)정도나 봤을까.

-한국 최고의 출판인이라 할 민음사의 박맹호 회장과 동창이지요.

▶그렇지. 김덕주 전 대법원장, 김동규 전 상공부 차관 등이 청주고 동창이지. 맹호는 보은의 제일가는 갑부 아들인데 가업을 이으라는 선친의 뜻을 거역해 출판업에 뛰어든 변종이지. 그런데 부모의 유산 대신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했어. 출판으로 일가를 이룬 그가 제일 부러워.

-대단한 호주가이자 애주가여서 술에 얽힌 일화가 많습니다. 요즘 주량은 어느 정도이십니까.

▶요즘은 많이 못 먹어. 소주 한 병 반 정도. 한창 때는 24시간을 내리 마신 적도 있지. 젊어서는 국회의원을 지낸 손세일, 한겨레 논설위원을 지낸 임재경 등과 어울려 광화문 빈대떡집과 명동의 바를 전전하곤 집으로까지 옮겨서 마셔댔지. 나중엔 고은, 김수영 시인 등과도 자주 어울렸고. 그는 '문주(文酒) 40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언론 정치 풍속사>라는 책을 썼을 정도로 일화가 많다.

-나름의 주법이라면.

▶어느 글에서 내가 '주도 10개조'를 설파했는데 이런 것들이지. 술은 아주 천천히 마셔라, 안주를 즐겨라. 술집의 품위를 살펴서 선택하라. 싸고 비싸고에 관계가 없다. 주모(酒母)의 품위가 정갈하냐 아니냐에 관계된다. 주모와의 인정미의 교류도 중요하다. 단골이 되면 거기서 인간사 이야기가 꽃을 피우게 되고 하나의 세상이 열린다. 단골이 다섯 곳이면 다섯 개의 세상이 있다. 되도록 현찰로 하고 팁은 꼭 주도록 하라 등등이다.

-요즘은 어떻게 소일하십니까.

▶책 읽고 몇 개의 잡지 등에 글 쓰고. 아직도 서생인 셈이지. 공부하는 자세가 중요해.  


책갈피

책은 독자를 위해서 쓰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정리를 위해서 쓰는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에세이에서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의 에세이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에서

남 前장관의 읽어보니, 좋던데요

▶마틴 에덴 <잭 런던/한울>

독학으로 글을 깨우친 노동자이자 자연주의자였던 잭 런던의 자전적 소설. 가난하지만 열망에 차 있던 선원인 에덴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해 결국 부자와 명성을 얻게 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단지 그의 돈과 명예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 나머지 항해 중 투신 자살한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다룬 <위대한 개츠비>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 <이병주/바이북스>

언론인 출신으로 선이 굵은 대하소설을 많이 썼던 이병주의 공식 등단작. 선원이지만 클라리넷 연주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겪은 꿈 같은 이야기를 통해 자의식 극복을 위한 분투와 얼어붙은 감옥 속 유폐된 황제의 자유로운 사상과 철학,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상상력과 서사를 엿볼 수 있다.
끟국가란 무엇인가 <해롤드 조셉 라스키/두레>
영국의 정치학자인 라스키가 헤겔 등의 '주권적 국가론'을 비판하면서 '다원적 국가론'에 사회주의적 색채를 더한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한 저작.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던 20세기 전반기에 이론과 실천에서 모두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라스키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획일주의적 국가주의가 부당하다는 철학이 설득력 있게 묘사돼 있다.

▶<안개> 등 미구엘 데 우나무노 소설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소설가로 스페인 문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우나무노의 소설들. 1864년 스페인 빌바오에서 바스크인 부모 아래서 태어나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당원을 비난한 일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 연금을 당했다가 내전의 와중에 서거했다. 대표작 <안개>는 실연당한 주인공이 삶과 사랑, 지성과 감성, 믿음과 이성 등의 문제를 두고 작가 자신의 내면과 논쟁하는 형식의 메타픽션 소설.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조지 오웰>

<동물농장>과 <1984년>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의 평론집. 정곡을 찌르는 미학적ㆍ철학적 평론을 탄생시킨 오웰의 사고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엮은 조지 패커가 말했듯이 '문장 하나하나가 어떻게 해서 대중의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지 그 길을 여실히 보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육서이기도 하다. 


약력

충북 충주생 ▲청주고, 서울대 의예과(2년수료), 서울대 법대졸 
한국일보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10, 11~13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호남대 객원교수 
저서 <언론정치풍속사>,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 

윤승용 논설위원 yoon6733@asiae.co.kr윤동주 기자 doso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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