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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솥을 뒤집어쓰고 다닌 토정(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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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8)

그 와중에 토정 이지함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 사건이 터지기 하루 전날,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장인의 집안에 불길한 기운이 가득하니 빨리 몸을 옮기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정랑은 사위 부부와 식솔들을 토정의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이튿날 의금부 나장과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졸지에 역모 집안의 사위가 된 토정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서해안 일대를 떠돌아다녔다. 형이 있는 단양을 찾은 것은 그 방랑의 일부였다. 치열한 정쟁은 권력의 광기를 부르고, 결국 어이없는 피해자를 양산한다. 나라를 발칵 뒤집은 벽서사건과 역모의 증거물로 등장한 '모의책'은 나중에 시인 묵객의 계(契)모임 명단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토정은 당시 조선사회의 한 이단아(異端兒)나 기인으로 여겨졌다. 가난하여 밤에 불을 밝힐 수가 없자 도끼를 허리에 차고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큰 아궁이를 파고 소나무를 찍어넣어 불을 밝혀놓고 밤새도록 책을 읽기도 했다. 새로 지은 도포 하나를 입고 나갔다가 거지 아이들을 보고는 세 명에게 천을 잘라 나눠준 적도 있었다. 구리로 만든 솥을 뒤집어 삿갓처럼 쓰고 다니다가 쌀이 생기면 솥을 벗어 밥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사람들은 그가 열흘을 먹지도 않고 한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고 천리를 걷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 속에 가만히 섞여 결코 규각(圭角ㆍ모난 언어나 행동)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대인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배를 타는 솜씨가 뛰어났다. 직접 배의 키를 잡고 큰 바다를 평지처럼 다녔다고, 영의정을 지낸 조카 이산해가 묘갈명에 적고 있을 정도다. 서해 바다 한가운데서 소금산을 찾아내 소금을 가득 싣고왔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토정이 나중에(선조 6년ㆍ1573년) 포천현감이 되었을 때 구민대책으로 올린 상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농사만 짓고 있는 이곳 사람들을 염전사업에 투입하여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해안에서 자라 염전에 익숙했던 그인지라, 이런 의견을 내놨을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땅뿐만 아니라 바다도 백 가지 재용(財用)이 가능한 창고라 할 수 있으며, 모름지기 지도자는 이런 것들을 십분 활용해 지방의 경제를 살려야 합니다."
토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율곡 이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성격과 행동을 들어, 그를 관직에 쓰는 것에 반대했다. 황강 김계휘(김장생의 부친이다)와의 대화가 남아있다. 김계휘가 "토정을 제갈량과 비교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이이는 대답한다. "토정은 적절히 쓰일 수 있는 재목이 아닙니다. 그를 물건에 비한다면 이상한 꽃(奇花), 특이한 풀(異草), 진기한 새(珍禽), 괴상한 돌(怪石)일지는 몰라도, 좋은 비단(布帛)이나 콩과 밤(菽栗)은 아닐 것이오." 이 말을 나중에 전해들은 토정은 말했다. "그 말씀의 취지가 엄정하고 귀한 것은 알겠으나, 세상이 포백과 숙률만 가려 취한다면, 천년이 가도 새롭게 적용할 무엇이 어디에서 나오겠으며 고답만 일삼는 지리멸렬은 어디에서 벗겠는가." 또 정홍명은 '기홍만필'에서 "토정은 기발하여 사람의 주목을 많이 끌었지만 수수께끼 같은 농담을 일삼고 태도도 점잖지 않아 도학군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평하고 있다. 토정이 명성을 높이게 되는 것은, 뜻밖에도 19세기 이후 '토정비결'이라는 책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여항(閭巷)에서 유행하던 길흉을 점치는 책으로, 누군가가 주역에 밝았던 토정의 이름을 슬쩍 빌어 쓴 것이다.

퇴계는 토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현실에 맞는 방책을 과감히 제안하는 큰 선비라 들었습니다. 혹시 성인의 권도(權道)에 대해 말씀하신 고견을 다시 들을 수 있겠는지요?"

그런 요청에 토정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사또 같은 대인(大人)을 뵙게 된 것이 큰 영광입니다. 권도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실 방도나 계책에 대해서 등한시하는 풍토를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권(權)은 따지고 저울질한다는 의미로, 도(道)는 현실에 맞게 변통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실용정신 같은 것입니다. 현실을 감안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취하는 구체적인 방안과 대책으로 산업을 진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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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마포 옹기골 흙집이 '토정'이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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