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잠시 동안의 초나라 말단 관리 생활을 접고 명성이 자자한 정치사상가 순자 밑으로 가 학문을 연마했다.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수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당시의 천하정세를 면밀히 분석한 후 서쪽의 진나라를 자신의 재능을 펼칠 나라로 판단했다. 진은 재상 상앙의 개혁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효율적 국가운영체제를 갖추었고 진왕 영정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운이 융성하는 형세였다.
그는 천하통일의 원대한 구상을 진왕에게 제시했다. '기회를 잡으면 절대로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속전속결의 논리를 강조했다. 한나라부터 공격해 멸망시켜 나가야 한다는 단계적 통일론을 제시했다. 또한 군사력과 뇌물 전략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천하통일 전략이야말로 시대의 흐름과 6국의 정세를 꿰뚫은 탁견이었다. 냉철한 현실 정치가로서의 이사의 출중함을 보여주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봉하는 분봉론을 반대하고 강력한 황제의 독재체제를 뒷받침하는 군현제를 주장한 것도 그였다. 진시황은 "만약 제후들을 분봉한다면 이건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천하의 백성들이 다시 곤경에 빠지지 않겠는가"라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중앙-군-현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행정체제가 그 후 2000년간 중화제국의 버팀목이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진시황의 전제 정치와 과격한 정책 추진은 제국 전체를 질식시켰고, 이사의 경륜도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리한 만리장성 축성은 수십만 민초의 삶을 앗아갔고, 분서갱유는 지식인들의 제국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진시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엄청난 권력의 공백을 가져왔다. 내우외환을 막기 위해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로 유지키로 한 결정은 그를 칼날 위에 서게 만들었다. 환관 조고의 여섯 번에 걸친 회유에 무너진 이사의 정치적 운명은 결국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거짓 유조에 속아 자결한 장남 부소, 우매한 호해의 이세 황제 즉위, 조고의 음모와 이사의 몰락은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모진 고문에 모반죄를 인정한 이사는 BC 208년 수도 셴양(咸陽)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통일제국의 초석을 닦은 탁월한 정치인이었지만 지나치게 명리를 좇아 결국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지킬 수 없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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