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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엄원태 네번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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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기자] 오랫만이다. 요즘의 시들은 낭송이 어렵다. 그래서 눈으로만 읽게 된다. 하지만 시집을 넘기자 첫 시부터 입술이 절로 달싹거린다. 그렇다고 운율, 가락이 넘치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진다. 엄원태 시인의 네번째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는 육성으로 쓰여졌다. 깊은 소리가 나는 까닭이다. 이번 시집은 세번째 시집 '물방울 무덤' 이후 6년만이다.

엄 시인은 오랫동안 병마와 싸워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 아름다움과 애뜻함, 소멸에 대한 담담한 긍정이 넘친다. 소멸은 엄원태의 시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덧없이 사려져 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애도"라는 시인의 말처럼 살아 있음의 소중함이 뭍어 있다. 그 애뜻함으로 '너'와 교감하고, 교류하고, 바라보고, 얘기를 들어주고, 그 소멸을 기꺼이 받아들여 준다. 나와 교류, 교감하고 사라진 것들은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라는 제목이 밝히 듯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세상과 싸우거나 조롱, 냉소, 분노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절실하다. 나와 '너'의 거리는 불과 몇십미터일 수 있고 우주만큼 아득한 거리일 수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생멸을 반복하고, 인간은 그 궤도에 잠시 올라탔다 내린다. 어느 인생이든 희노애락이 공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100% 순도 높은 행복만을 기대할 순 없다.

"밭모퉁이 빈터에 달포전부터 베르니카 은하가 떴다. 봄까치꽃이라고도 한다. 베르니카 은하에서 연보랏빛 통신이 방금 도착했다. 워낙 미약하여서 하마트면 놓칠 뻔 했다. 인근 광대나물 은하까지는 불과 몇십미터이지만, 꽃들에겐 우주만큼이나 아득한 거리일 떠.(중략) 오느 봄날엔가, 당신이 까닭없이 서러워져 홀로 들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때, 저 외진 지상의 별무리들에게 그렁그렁 눈물 어린 눈길을 주었던가. 그래선지 오늘 내가 거기서 왠지 서러운 빛깔의 메시지를 전해 받는다. 슬픔도 저리 환하다."('4월' 중 일부)

그런 '너'의 거처는 '타나호수'다. 타나호수는 내 흉강의 한쪽이며 횡경막과 고통의 임계 지점에 있다. 결국 나는 '너'와 객체이면서 일체이고, '너'의 숙주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에서 '너'는 사라져도 펠리칸들이 5000년을 기다릴 수 있는, 말하자면 영원한 곳에 순간을 머물고 있다.
"이제 너는 타나호수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나호수, 내 침침한 흉강 한쪽에 넘칠 듯 펼쳐져 있다. 거기에 이르러면 슬픔이 꾸역꾸역 치미는 횡경막을 건너야 한다. 고통의 임계지점, 수평선 넘어가면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개의 섬에 봉쇄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오래전 거기서 죽었다. 파피루스 배 탕크와는 한때 내 몸이었다.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리라. 그때면 너는 물론 거기 없을 테지만, 한 무리 펠리컨들이 너를 대신해서 오천년 쯤 날 기다려주리라.(후략)" ('타나호수')

'너'는 비닐 봉지가 돼 '자늑 자늑 바람을 껴안고 나부끼'(독무)며 '하염없는 몸짓'의 적요한 독무를 펼치기도 하고, 때로 산길을 내려올 때 '제법 굵은 삭정이'로 '한 걸음 앞쯤에 뚝 떨어지'(나무가 말을 건네다)거나 '자귀나무 분홍 꽃술'(붉은 버섯을 보다)이 되기도 한다. '너'는 소멸 혹은 소멸 직전에 나에게 사로잡혀 뼈저린 고통을 주는 존재들이다. 삶에서 도망치 듯 멀리 하려거나 도망치려 애쓰는 것들은 언제나 알고 보면 마음 속의 괴로움이거나 집착일 수 있다. 그래서 버릴 수 없으니 포용해야 한다. 엄원태의 시가 지닌 고요하고도 적막한 힘이다.

"마음을 연 어미가/ 제 새끼 받아들여 핥아주고 젖을 물리듯/가슴 깊이 흐르는 강 같은 쓸쓸함으로/징한 새끼 같은 삶을 받아들이곤 한다네."(후스루흐 중 일부)

그토록 절절한 삶은 '언제나 죽음 지척의 일'(주저앉은 상엿집)이며 '한바탕 부유'(공중무덤)'이다. 또한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는 저녁 하늘 위 무심한 붉은 구름. 말없이 돌아가는 죽지 흰새 몇, 그 아래 조용히 팔을 거두어 들이는 잎 큰 후박나무들. 저 홀로 푸르러 어두워가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다만 흘러가는 것들)에서의 쓸쓸함, 그 견딤의 과정이다.

"대개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말라 붙거나/짓밟혀 토막 난 몸을 겨우겨우 꿈뜰거리고 있다/새들마저 외면하는 이 지난한 필사의 순례행렬은/왜 반복되어야 하는지/검은 유리를 두른 자동차들이 거칠게 내달리는/일몰의 산업도로를 건너려는 허리 굽은 노파의 막막함과/메마른 흙먼지길 가로질러 새 영역을 찾으려는/지렁이들의 이 무모함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갈색으로 퇴색해 가는 사마귀와/식어가는 돌멩이 위에 미동도 없이 엎드린 잠자리와/마른 호흡으로 고통스레 죽어가는 지렁이의 육신들은/하나같이 같은 길을 애달프게 가는구나"

결국 '나'는 현실 생활에서 정체를 몰라 길을 헤메는 이들과는 전혀 다르다. 주변을 둘러싼 불안에 휩싸여 시달리지 않고, 수시로 삶을 부인해야하는 경우도 없다. 고통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엄원태의 시에 자못 숙연함이 감도는 이유다.

"고독은 그늘을 통해 말한다/어쩌면 그늘에만 겨우 존재하는 것이 생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늘로 인해 생은 깊어질 것이다. 고통과 결핍이 그늘의 지층이며 습곡이다./밤새 눈이 왔다. 말없이 말할 줄 아는, 싸락눈이었다"('싸락눈' 전문)

시인은 끝내 자신의 내면세계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고통이 점철돼 있다. 거기에 도달해가는 과정은 비장하기도 하다. '덩치가 북극곰만하'고 '무려 구백구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외로룸을 '제 몸에 저장된 고독을 태우면서 버텨'(극지에서)낸' 후에야 '먼 우레처럼/다시 올'(강 건너는 누떼처럼)수 있다. 온전히 내안의 '너'와 직면해 삶을 켜안을 수 있게 된다.

시인에게 현실은 '좀처럼 나아질 것 없는' '희망에다 또 호프'(희망호프집)인 고문이다. 그렇다고 절망에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고 울부짖지도 않는다. 그래서 상처를 미봉하거나 긍정의 외피로 감춰두려 하지도 않는다.

"이미 썩거나 메말라버린 마음인 듯/ 종이꽃들 퇴색하거나 쪼그라들어 내장마저 공허하고/속이 빈 것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데/문득, 짐승의 비틀린 발목을 들여다보게 되는 때가 있다//주검이라면 구더기라도 들끓어야 마땅하거늘,/귀신 살던 몸이라 파리도 알을 슬지 못했나 보다/메마른 부패, 미라같은 사체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마음의 일별이 그걸 세세히 어루만지고 돌아오면/오전 산책은 건조하게 마무리되곤 한다//소멸은 그다지 멀지 않다/삶이런 언제나 죽음 지척의 길"('주저앉은 상엿집' 일부)

무상한 눈길로 소멸을 인정하는 시인의 육성은 가뭇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보내는 애뜻한 빛이다. 그 빛은 예언이다. '우레처럼 다시 올...'것이라는 시인의 예언은 '주검을 딛고, 죽음을 건너는 무수한 발굽들' 즉 '어쩔 수 없이, 네가 나를 건너가는 방식이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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