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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일본의 변심… 불친절해진 와타나베씨

최종수정 2012.10.18 06:00 기사입력 2012.10.18 06:00

[도쿄=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주말이었던 13일 오전 도쿄 번화가로 이어지는 신주쿠산초메(新宿三丁目)역. 말쑥한 차림의 중년 남성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역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스미마셍(미안합니다)'. 예전같으면 몇 번은 들었을 그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깨를 부딪친 남성은 눈을 흘기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개찰구 앞에선 30대 초반 남성과 승무원이 승강이를 벌였다. "초과 운임을 내라"는 승무원과 "원래 초과 운임을 안 무는 구간 아니었느냐"는 승객이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승무원과 입씨름을 벌이던 승객은 자판기 고장을 항의하던 다른 승객의 말을 차고 들어와 언성을 높였다. "내가 먼저야. 넌 좀 기다려."라면서.


2012년 가을 '스미마셍의 나라' 일본은 달라져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미안합니다를 외치던 그 일본은 거기 없었다. 사람들은 지쳐보였고 눈에 띄게 불친절해졌다. 일본 사회의 생기를 앗아간 에너지 뱀파이어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일본인들의 변심 이유를 재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일본화)에서 찾는다. 이 말은 원래 아시아 젊은이들이 일본 문화에 열광하며 동조하는 현상을 의미했지만, 이젠 경기둔화·투자실종·소비부진을 아우르는 일본형 장기불황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경기 둔화가 품위를 유지할만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지표들은 모두 우하향 곡선을 그리며 고꾸라졌다. 지난 2000년 국내총생산(GDP)의 25%에 다다랐던 총투자비율은 10년 만에 20%까지 떨어졌고, 2000년 8%를 웃돌던 순저축률은 10년 새 2%대로 줄었다.

그 사이 늘어난 건 노인 인구와 나랏빚 뿐이다. 2005년 총인구의 20% 수준이었던 65세 이상 노인 비중은 불과 5년 뒤인 2010년 25%를 넘어섰다. 2008년 200%를 한참 밑돌았던 GDP대비 국가채무 비율 역시 2012년 현재 236%까지 폭등했다. 내년에는 일본의 나랏빚이 GDP의 250%에 육박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예상한다.

현장에서 본 일본 경제는 시들했다. 긴자 거리엔 여전히 명품이 넘쳐나고 패션 하우스들은 일본인만을 위한 긴자 모델을 만들어내지만 상점엔 파리가 날렸다.

마츠야긴자 백화점에서는 1000엔(우리돈 1만4000원)안팎의 잡화가 모여있는 1층에만 사람이 몰렸다. 경기의 바로미터인 남성복이나 아동복 코너에선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복도에 울릴 만큼 손님이 적었다.

긴자에서 만난 한 금융맨은 "요즘 일본에선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20년, 30년이 될 수도 있다는 비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면서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염세적인 가치관이 확산된 것도 경제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 듯하다"고 말했다.

지난 1980년대부터 20년을 일본에서 지낸 미주개발은행(IDB) 대외총괄 스페셜리스트 윤민호 박사도 "이제 일본 사회에서 불친절해진 일본인을 만나는 건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 됐다"고 말한다.

윤 박사는 "경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된 최근 10년 사이 일본인들은 '멘탈붕괴'라 부를 만한 심리적 변화를 겪고 있다"면서 "저출산·고령화 현상에 따라 경제활력이 떨어지고, 장기 불황과 대지진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더 걍팍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윤 박사는 이어 "국내 정치 사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일본이 요사이 한·중 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는 것 역시 일본인 고유의 참는 문화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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