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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32>일제가 버리고 간 회사들..한국 대기업 싹을 틔우다

최종수정 2012.09.19 10:30 기사입력 2012.09.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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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 남은 日 맥주공장 거머쥔 박두병·민덕기
일제 때 유력기업가 모두 사라지고, 2700여개 적산기업 고스란히 남아
줄대고 불하받고..쟁탈전 벌어져
선경직물 생산계장 최종건, 25세 화약공장 관리인 김종희..
재계 영맨들 속속 전면으로


마침내 일본이 패망했다.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종전이 되자, 그동안 무람없이 설쳐대던 일본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해탄을 건너 줄행랑쳤다. 길바닥을 질질 끌고 다니던 게다소리가 멎은 가운데, 일본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임자 없는 재산이 여기저기 즐비했다. 일본인들이 팽개치고 간 이런 재산을 이른바 적산(敵産)이라 불렀다.

일찍이 개항에서부터 8ㆍ15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축적한 재산으로, 기업, 부동산, 유형 또는 무형의 동산과 주식 및 지분 따위였다. 미군정청은 동양척식의 농지를 포함한 적산 재산의 전체 가치를 3053억원(지금 돈 약 1520억 달러)으로 추정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나라 주요 산업 시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것이었다. 주요 산업 시설의 80%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이 중 70%는 북한에 산재해 있었다.

박두병 동양맥주 회장(오른쪽 첫번째)과 정수창 사장(오른쪽두번째)과 1970년 장기신용은행 관계자와 투자협의를 하고 있다.

박두병 동양맥주 회장(오른쪽 첫번째)과 정수창 사장(오른쪽두번째)과 1970년 장기신용은행 관계자와 투자협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산업자본은 일제 강점기 때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현해탄을 건너왔다. 1930년대 말 산업통제법이 발효되면서 비교적 통제가 덜한 한국으로 서둘러 진출해온데 이어,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많은 산업 시설들이 한국으로 소개됐다.
때문에 해방 직후에도 꽤 많은 산업 시설이 남으면서, 적산으로 분류된 기업의 수만 2700여 개를 헤아렸다. 당시 기간산업으로 지정된 대부분의 대기업은 모두가 적산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었다. 민족기업이라고 해봤자 김연수의 경성방직, 김영준의 천일고무 등 대여섯 개가 고작일 따름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산업 시설들이 종전과 함께 줄행랑친 일본인들의 철수 이후 임자 없는 재산으로 덩그러니 남게 됐다. 임자 없는 재산은 누구라도 먼저 차지하는 자가 곧 임자였다. 이러한 적산을 잡기 위해 너도나도 벌떼처럼 몰려들었음은 물론이다. 적산 가옥은 문패만 바꿔달면 주인 행세를 했다. 적산 토지는 말뚝만 박으면 내 땅이었다.

SK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이 1969년 1월 폴리에스테르 섬유공장을 점검하는 모습.

SK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이 1969년 1월 폴리에스테르 섬유공장을 점검하는 모습.


다만 적산 기업만은 덩치가 좀 컸던 탓일까. 서로 눈치만 살피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미군정청이 법령을 선포했다. 일본인 재산의 매매는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적산 기업에 관리인을 선임하거나 파견시킨데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선 적산 기업을 불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적산의 관리인에겐 최우선 순위가 부여됐다. 적산 기업의 관리인이 된다는 건 곧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차지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경제계가 발칵 뒤집혔다. 저마다 승부욕이 넘치는 얼굴로 어떻게든 줄을 대기 위해 머리통이 깨져라 몰려들면서 브로커가 날뛰고 정치권력이 춤을 췄다.

황금알을 낳는다는 적산 기업은 그렇게 새 주인이 속속 나타났다. 다 그런 건 아니라지만 브로커든 정치권력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며, 연고권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 하루아침에 새 주인으로 등장했다.

최초의 근대기업가 박승직의 후계자인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인이 되었다. 일본 기린맥주가 영등포역 철로 변에 건설한 소화기린맥주는 한국인 가운데 김연수와 박승직이 각기 200주씩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박두병은 그런 연고로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인이 되면서 결국 불하받게 된 것이다.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훗날 동양맥주, OB맥주)를 불하받으면서 포목상에서 맥주업으로 전업, 오늘날의 두산그룹을 키워내는데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 맥주기업의 원조인 삿보르비루는 동경제대 경제학부 출신 민덕기의 소유가 됐다.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는 명문가의 후손답게 종로 관훈동의 태화관 건너편에 99칸짜리 저택에서 살았는데, 신분에 걸맞지 않는 맥주공장을 불하받아 조선맥주(훗날 하이트맥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국내에서 화약을 독점 제조, 공급하는 조선화약공판에 근무하고 있던 김종희는 불과 25살의 나이에 이 회사의 화약 공급 계열사인 조선유지의 인천공장 관리인이 됐다. 김종희가 일본이 남겨두고 간 창고 안의 재고를 몽땅 처분해서 자금을 만든 뒤, 그 자금을 다시 화약 공장에 투자한 것이 오늘날 한화그룹의 시작점이 됐다.

선경직물 또한 젊은 25세의 생산계장 최종건이 자치위원장이 되면서 연고권을 얻어 관리인이 됐다. 관리인으로 선경직물을 불하받으면서 지금의 SK그룹을 일으키는데 초석을 닦았다.

일본 무장고등공업학교 출신으로 관동기계공작소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하던 김연규 역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기계공작소를 불하받았다. 김연규는 이후 상호를 대한중기공업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직전까지 조선지기(紙機)와 조선주철 등 소규모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김지태는, 비록 이승만 정부의 눈 밖에 벗어나 국내 최대 기업 조선방직을 눈앞에서 아깝게 놓치긴 했으나 낙심할 필요까진 없었다. 곧장 아사히견직의 관리인이 되면서 전국에 흩어져있던 제사공장들을 인수, 한국생사그룹을 일으키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떠올랐다.

대구에서 양말공장을 하던 정재호는 조선방직을 넘겨받았다. 김지태가 강일매에게 빼앗겼으나 경영 부실로 내몰리고 말면서 결국 정재호가 붙잡았다. 그 밖에도 정재호는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이 불하받아 친척에게 맡겨둔 오우방직 등을 인수받으면서, 1960년대 중반까지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랭킹 2위에 오른 삼호그룹을 키워낼 수 있었다.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김성곤 역시 적산을 불하받으면서 업종을 바꿔 방직산업으로 투신했다. 그는 영등포에 자리한 적산 기업 경기염직에서 방적기 2천추와 함께 적산 기업 조선직물의 토지와 공장건물을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세우면서 쌍룡그룹을 일으키는데 발판을 구축할 수 있었다.

평양 태생의 김형남과 포항 태생의 김용주는 조선 4대 방직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적산 기업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을 불하받아 공동으로 경영하다, 각기 일신방직과 전방으로 분가했다. 김용주는 또 적산 기업 조선우선의 관리인을 맡다 불하받아 대한선주(훗날 한진해운에 인수)로 개명한 뒤, 1979년에는 첫 '1억 달러 운임의 탑'을 수상하는 해운 기업으로 키워냈다.

동양방직공사를 불하받은 서정익은 이 공장을 동일방직으로 키워내면서 지금의 동일그룹을 이룩했다.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 백낙승은 고려방직공사를 불하받아 태창방직으로 개편했으며, 함경도 청진에서 70여 척에 달하는 대형 선단을 이끌며 정어리 어업으로 재계에 뛰어든 설경동은 군시공업 대구공장을 불하받아 대한방직으로 개편시켜 오늘날의 대한전선그룹으로 키우는데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적산 기업 영강제과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삼총사 민후식, 신덕발, 박병규가 해방 이후 불하받았던 공장이 지금의 해태제과다. 조선주조 군산공장을 불하받은 강정준은 지금의 백화양조를, 조선도시바전기를 불하받은 서상록과 장병찬은 이천전기를, 지금은 비록 CJ그룹에 인수 합병되고 말았지만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을 불하받은 함창희는 동립산업으로 한때 재계에서 반짝이던 별들이었다.

그밖에도 적산 기업을 불하받아 지금의 대기업으로 키운 사례는 헤아릴 수 없다.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미쓰코시백화점과 조선생명을 불하받아 신세계백화점과 삼성화재로, 현대그룹의 정주영은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을 불하받아 인천제철로, LG그룹의 구인회는 조선제련을 불하받아 LG금속으로, 대성그룹의 김수근은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을 불하받아 대성산업으로, 삼화제철을 불하받은 장경호는 동국제강으로, 한국타이어ㆍ조선피혁을 불하받은 조홍제는 효성그룹으로, 대농그룹의 박용학은 조지야 백화점을 불하받아 미도파백화점으로, 조선제분을 불하받은 최성모는 신동아그룹으로, 동양그룹 이양구는 소야전시멘트 삼척공장을 불하받아 동양시멘트로, 천야시멘트 경성공장을 불하받은 김인득은 벽산그룹으로, 한일면업 대구공장은 내외방직으로, 삼척화학 카바이드공장은 북삼화학으로, 제천제철은 삼화제철로, 삼성광업은 장항제련소로, 조선전선은 대한전선으로, 북선제지화학공업은 전국제지로, 조선화재해상보험은 해동화재보험으로, 일본고주파는 풍한산업으로, 대성목재와 부산제빙냉장은 상호가 그대로인 채 주인만 바뀌었다. 단성사ㆍ국도극장ㆍ명동극장ㆍ문화극장ㆍ스카라극장 등은 주인을 잘못 만나 한동안 돌고 돈 끝에야 비로소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적산 기업 가운데는 지금의 공기업도 빼놓을 수 없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은 한국전력으로, 소림광업은 대한중석으로, 조선주택영단은 주택공사 등으로 제각기 탈바꿈했다.

한데 대한중석은 공기업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새 주인을 찾아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야 했다. 일찍이 1934년에 설립돼 강원도 상동광산과 경북 달성광산에서 텅스텐 광산과 제련업으로 사세를 확장해온 대한중석은, 공기업 가운데 1호로 1994년 민영화의 길을 밟게 된다. 당시 대한중석은 명동의 금싸라기 땅과 100만주에 달하는 포항제철(포스코) 주식, 500만평의 상동광산과 15만평의 대구공장 부지 등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면서 낙찰가 661억원에 나승렬 거평그룹에 인수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 때 IMF 외환위기를 넘지 못한 채 거평그룹이 도산하고 말면서, 대한중석은 이스라엘의 금속가공 기업 IMC로 넘어갔다. 그리고 2006년에는 워렌버핏의 투자회사 벅셔헤서웨이가 지분을 인수하면서, 지금은 초경합금 절삭 공구를 주력 생산하는 대구텍으로 이름과 문패를 바꿔 단 상태다.

해방 이후 적산 기업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대한중석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불하받은 기업이 그만 경영 부실로 내몰리면서, 또는 곧이어 벌어진 6ㆍ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역사 속으로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이밖에도 미군정청의 원칙 없는 고무줄 재량에 의해 불하된 적산은 또 있었다. 주택 8000여 호, 선박 2000여 척, 상점 2000여 개를 헤아린다고 알려졌으나 더 이상 확인할 길은 없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적산으로 분류된 기업 수만 2700여 개나 헤아렸음에도, 일제 강점기 전성기를 구가하던 유력 기업가들의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동안 일본 자본에 맞서 꿋꿋이 버티어왔던 경성방직의 김연수, 광산 재벌 이종만,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자동차왕 방의석, 동일은행의 민규식 등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적산에 몸담고 있던 25살의 새파란 기술자에서부터 낮은 직급의 사무원, 그리고 이병철ㆍ정주영ㆍ구인회ㆍ조홍제ㆍ박용학ㆍ이양구ㆍ김인득 등과 같이 일제 말기에 창업을 했거나 해방 이후에 창업한 젊고 새로운 기업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 맡고 나섰다. 그동안 경제계를 호령하던 유력 기업가들이 해방 이후 '반민특위'와 같은 정치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비틀거리고 있을 적에, 이같이 젊고 새로운 기업가들이 임자 없는 적산 기업을 거저줍다시피 불하받으면서 대거 등장케 된 것이다.

그렇대도 해방 이후 적산 기업 불하는 아무래도 너무나 성급하고 잘못된 역사였다. 국민의 자산을 국가 권력을 통해 사적 자본으로 전환시켜 해방 이후 자칫 해체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질서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는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실에 치우치고 말았다는 오명을 벗어나기란 어려워 보인다. 경제적 문법에 따른 엄정한 기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저 힘깨나 쓴다는 정치권력에 따라 결정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당시 미군정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끗발, 예컨대 미군정청의 재정부장 고든 중령이랄지 인사행정처장과 물가행정처장을 역임한 한국인 정 아무개, 군정 요직에 있던 조 아무개와 장 아무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 수립 이후까지 계속된 적산 기업 불하에서도 이러한 정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정부와 자유당 실력자들의 이른바 '빽'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 빽만 잡으면 원하는 적산 기업을 손쉽게 차지하여 대자본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산 기업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대자본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을 경영해본 학습이 돼 있지 않은데다, 원료 부족이며 기술 부족 등으로 대부분 정상 가동이 어려워 또 다른 주인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이같이 변화무쌍한 분위기 속에서도 반세기 넘도록 기업을 키워내어 오늘에 이른 기업가들을 보노라면 가히 놀라운 역량이 아닐 수 없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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