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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하의 한국기업성장사]②종로 '육의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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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한성서 80리 제물포가 열리자 성냥·양잿물 없어 못팔고
-철도 개통에 500년 상계 날벼락

일제시대 개통된 중앙선 원주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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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백성이면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 종로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곧 통공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라는 사상들의 날로 커지는 목소리에 언제까지나 안심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오랜 공존공생 관계였던 조선왕조가 급속히 힘을 잃어가면서 종로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조차 그 세력을 하나둘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20세기 벽두에 종로 육의전은 급기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조선 상계를 지배해 왔던 그 화려함과 시끌벅적함은 온데간데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해체되고 마는 비운에 처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종로 육의전의 해체는 그러한 사상의 거센 도전 때문도, 급속히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왕조 때문만도 아니었다. 500년 전통의 종로 육의전이 그처럼 허망하게 종지부를 찍고 만 데에는 정작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근 230여년 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인들에 의해 그렇듯 하루아침에 붕괴되고야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한성은 무려 500여년 동안이나 시간이 정지하고 만 듯 한결 같은 풍경을 유지해 왔다. 주거 지역은 대부분 세습적이었으며 외국인은 물론이고 지방 사람들조차 함부로 끼어들어와 섞일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던 한성에 낯선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때가 1880년 4월이었다. 일본의 강압으로 마지못해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조약(1876)에 따라 같은 해 일본 공사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본 공사관은 아직 도성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돈의문 밖 청수관에 자리를 잡아야 했으며, 그나마 2년 뒤에는 습격을 받고 말았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후원을 받아 신식 군대를 선별해 훈련하는 과정에서 차별 대우를 받던 구식 군대가 민간인들과 합세해 임오군란(1882)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일본 공사관은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은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해 일본 육군의 다카시마 소장이 1200여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한성으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리고는 지금의 종로 2가 관훈동에 자리한 철종의 사위 박영효의 사저를 공사관으로 삼았다.

이때 일본 공사관 직원은 30여명 남짓이었다. 또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일본군 200여명이 도성 안에 주둔하게 된 첫 외국인이었다.

이어 일본은 그들을 상대로 물품을 조달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국 상인들을 불러들였다. 처음 한성에 들어온 일본 상인은 협동상회와 대창조(大倉俎), 경전조(慶田俎) 등지에서 파견한 10여명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성에 진출한 이들 일본 상인은 도성 안의 조선인을 상대로 상거래를 벌이지는 않고 있었다. 피차 서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1884년 일본 공사관은 또다시 소실되고야 마는 운명에 처했다. 관훈동의 박영효 사저에서 지금의 종로 3가 경운동 소재 신축 건물로 자리를 옮겨 앉은 일본 공사관은 그러나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릫3일 천하릮로 끝나면서 다시 한번 성난 군중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이렇게 되자 일본 공사관은 다시 남산 아래 녹천정(옛 안기부 자리) 터에 신축 건물을 지어 옮겨가야 했다. 그와 함께 도성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던 일본인 거류민들이 일본 공사관의 발치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 일대로 모여들자, 일본은 자국민들을 보호해야겠다며 그 지역을 일본인 거류 구역으로 지정해버렸다.

조선 정부 역시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승낙해주고 말았다. 당시 진고개라면 깡그리 가난한 샌님들이나 모여 살던 남촌의 변두리인데다 진고개라는 지명 그대로 온통 진흙 구덩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거주 환경만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그래 어디 한번 실컷 살아 보거라 했던 것 같다.

더구나 이 무렵 조선으로 건너와 상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이 시기 진고개 일대 일본인 거류 구역의 일본 상인들은 도무지 칠칠찮아 보였다. 거의 모두가 이미 자국에서 거덜이 나 야반도주하다시피 허둥지둥 건너온 몰락한 상인들이거나, 아니면 영세한 자금만을 손에 쥐고 흘러들러온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당시 진고개, 아니 그들이 훗날 일컫게 되는 이른바 릫혼마치(本町)릮에는 일본인 소유의 가옥이라곤 단 한 채도 없었을 만큼 가난에 찌들었다. 그저 얼마 안 되는 푼돈을 밑천 삼아 행상이나 노점, 중개, 매춘 등 저마다 재물을 축적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물론 거기에는 조선인 소유의 가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근대적 땅 소유 개념에 서툰 가난한 샌님들을 살살 꾀어내어서 터무니없는 헐값에 땅을 사들이거나, 가옥을 저당 잡는 대신에 적은 돈을 빌려준 뒤 기일이 되면 일부러 다른 곳으로 피해 숨어 있다가 뜬금없이 나타나선 릫기일이 지났다릮며 가옥을 가로채는 등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상인들은 조선인 소유의 가옥을 적극적으로 소유하고 사들일 수 있게 됐다. 땅을 산 자는 그들만의 일본 전통 가옥을 지어 일본인 촌락을 야금야금 확장시켜 나갔다.

그와 함께 일본 상인들은 식민 지배 의욕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자신들의 이익 집단인 거류민회나 상업의회를 결성하는가 하면 진고개 일대를 근거지로 한 일본인 시가지도 발 빠르게 조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같이 진고개 일대를 자신들의 거류 구역으로 삼은 지 불과 3년이 지난 1887년에는 이미 상권의 구축까지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벌써 그들 소유의 상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그 지역 일본 거류민과 도성 안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이기 시작한 상점만도 50여 호에 달할 정도였다.

이즈음에 이르러선 진고개 일대 아니 혼마치에만 일본인들이 어느덧 수천 명이나 모여 살게 됐고, 일본 기생인 게이샤를 둔 일본 요릿집 화월루까지 영업을 시작해 장안의 새로운 구경거리로 등장했다. 왜각시를 구경한다고 눈깔사탕을 사러 가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일본 과자점 주인은 불과 몇 해 만에 떼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나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좀 더 훗날에 현해탄을 건너올 일본 거대 자본의 척후 정도일 따름이었다. 이들 초기 일본인 상인들은 종로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에겐 예고된 위협일 수는 있었으나,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에는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일본은 인천 제물포를 개항(1883)케 했다. 제물포의 개항은 강압적인 강화도 조약에 따라 이미 개항을 한 부산과 원산과는 또 다른 개항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었다.

무엇보다 제물포는 한성에서 겨우 80리(약 30㎞) 바깥이었다. 조선의 문턱이나 다름없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서구 열강들이 진작부터 눈독을 들여오던 터였다. 따라서 제물포에는 개항과 동시에 서구의 신문물인 개화 물품들이 앞다퉈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유교적 정신주의 생활 풍조 속에서만 호흡해 오던 이 땅의 뭇 백성에게 물질문명이라는 경이적인 신천지를 보여줬다. 눈앞에 펼쳐지는 근대화의 물결이 거침없이 휘몰아쳐 들어왔던 것이다.

개항장 제물포에는 지금껏 본 일조차 없던 서구의 이양선들이 속속 드나들기 시작했다. 한가로이 떠 있는 황포 돛단배와 바닥이 평평한 세속선들 사이로 덩치가 산더미만 한 서구의 화륜선과 철선들이 진기하다는 개화 물품을 가득가득 싣고서 하루가 다르게 밀려들곤 했다.

사실 장사라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물건, 그런 상품을 만들어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도록 하는 것이 곧 장사다.

1899년 9월 열린 노량진-제물포간 철도 개통식

1899년 9월 열린 노량진-제물포간 철도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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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제물포에 쏟아져 들어온 서구의 개화 물품도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분명 기대 이상의 획기적인 것들이었다. 일일이 부싯돌로 불을 지펴 생활하던 시절에 사용이 간편한 성냥이며, 빨래를 손쉽게 해주는 양잿물, 토포에 비해 값이 월등하게 저렴한 양포, 지긋지긋한 질환을 금세 낫게 해주는 간단한 양약, 가볍고 편리한 각종 양재기, 작고 가늘어서 두루 쓸 수가 있는 왜못을 비롯해 등잔용 석유 따위는 진기하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당장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사정이 이쯤 되자 개항장 제물포에 상인들이 떼 지어 모이는 일은 시간 문제였다. 진기하다는 개화 물품을 사가려고 한성에서는 물론 소문을 듣고 경기, 충청, 황해도 지방의 상인들마저 돈 보따리를 싸들고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런 개항장 제물포에 일본이 들여온 릫검은 괴물릮의 출현은 또 다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화륜거 또는 철마라고도 불렸던 검은 괴물 기차의 출현은 하루가 다르게 밀려드는 근대화의 물결을 싣고서,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성의 턱밑까지 한달음에 들이닥칠 수 있게 됐다.

물론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성의 노량진 사이를 기차가 달리기까지는 말썽도 적지 않았었다. 무엇보다 당시 사람들의 쇳길(철로)에 대한 공포심을 불식시키는 데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하긴 집 한 채를 새로이 지을 적에도 풍수지리설에 따라야 했던 당시에 땅과 쇠는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이었다. 쇠는 항상 물을 말리는 음양오행의 원칙을 가진 탓에서였다.

그렇대도 기차가 달리려면 도리 없이 땅 위에다 쇳길을 깔아야 했다. 또 그 쇳길은 그냥 쇳길이 아니라 번갯불을 번쩍번쩍 태우면서 검은 괴물이 달리기 때문에 그때마다 땅속의 물기가 과연 얼마나 말라버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까지만 해도 천하의 근본은 단연 농사였다. 바로 그 농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하는데, 기차가 번갯불로 땅속의 물기를 다 말려버려서 결국에는 황폐해진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좀처럼 목청을 높이지 않던 양반들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땅이 요동쳐 흔들린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조상의 묘지가 흔들려 결국에는 집안이 패망케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를 들어 기찻길이 양반집 묘지 인근을 지나가려 할 적마다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탈을 겪으면서도 끝내 철도가 개통된 것은 1899년 9월이었다. 화통에서 시커먼 연기를 연방 숨 가쁘게 뿜어내며 칙칙폭폭 우레와도 같은 바퀴소리를 내더니만, 천지가 진동하는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면서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성의 노량진 사이를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렵사리 쇳길을 깔아 개통한 기차는 또다시 애를 먹어야 했다. 근대화의 물결을 싣고서 치달려온 철마인데도 처음 한동안에는 통 승객이 없어 파리만 날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개통 첫해엔 기차를 탄 손님이 하루 고작 20여명 남짓밖에 되지 않아 적자를 면치 못했다. 결국 철도회사가 나서야 했다. 릫철도선무학사릮를 모집해 양반들을 계몽시키고 다니는 웃지 못할 촌극마저 벌어졌다.

아무튼 기적 소리도 씩씩하게 개항장 제물포에서 한성의 노량진까지 개화 물품을 한달음에 속속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 지난 500여년 동안이나 조선 상계를 지배해 왔던 종로 육의전의 금과옥조와도 같았던 금난전권은 하루아침에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굳이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을 통하지 않고도 진기하다는 개화 물품을 손쉽게 손에 쥘 수 있게 되면서, 조선의 만물상이라던 종로 육의전의 거리는 눈에 띄게 위세를 잃어갔다.

그러나 아직은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지고야 만 것은 아니었다. 일본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를 리 만무했다.

때문에 일본은 가뜩이나 재정이 어려워 쩔쩔매고 있는 고종에게 난데없이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릫고문정치릮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내세워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조선 정부로 하여금 자꾸만 차관을 빌려 쓰게 한 뒤 이내 손발을 꽁꽁 묶어버렸다.

그리고 나선 막대한 돈을 빌려주었으니 이젠 그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게끔 간섭(?)을 좀 해야겠다고 나섰다. 그 첫 번째 간섭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1905년의 기습적인 화폐개혁 단행이었다. 조선왕조의 경제를 아주 결단내고야 말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조선 상계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릫재무 고문 용빙 계약릮이라는 제법 그럴싸한 간섭을 앞세워 조선 조정의 재무고문으로 건너온 일본 대장성의 주세국장 메카다타네타로에 의해 전격적으로 단행된 화폐개혁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강도짓이나 다름없었다.

무거운 돈궤 대신 전통적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던 조선 상계의 어음 거래를 전면 금지케 해 한낱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데 이어 구 화폐와 신 화폐의 환전마저 사보타주했다. 이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어려워진 종로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은 그냥 가만 앉은 채 날벼락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육의전이라는 구심점을 잃게 되면서 그 많던 시전 상인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 시전 상인들마저 이내 자금난에 허덕이다 종래에는 집단 도산하는 사태를 빚으면서, 500년을 이어오던 종로 육의전도 20세기 벽두에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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