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황금 들녁을 물들인 해바라기를 만난 것은 며칠전 회사 근처 찻집에서다. 겨울 문턱의 찬 바람에 언 몸을 잠시 녹일까 모 중견기업 임원과 잠시 들렀던 그곳에서, 벽에 걸린 달력 속 해바라기는 더없이 싱그러웠다.
이런 해바라기가 연말이면 수난을 겪는다. 바로 '해바라기 인사'다. 절대 권력 앞에서는 소신과 원칙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출세에 눈이 먼 군상들이다. 이들에게 능력과 열정은 하찮은 것이다. 애사심, 동료애는 사치다. 권력자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지상과제다.
그날 그 찻집에서 해바라기 달력을 등지고 앉아 있던 임원도 '해바라기 인사'의 피해자였다. 그는 A그룹의 잘 나가던 임원이었다가 3년 전 B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자리를 옮겼다. 새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전문 경영인로부터 신임도 얻었다.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측근 실세들에게 '끈'을 연결하지 못하면 언제든 잘려나가는 파리 목숨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연말 인사철이면 그룹 실세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계열사 임원들의 발길로 그룹이 장사진을 이루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펼쳐졌다."
해바라기들이 판치는 문제가 어디 B그룹 뿐일까. 적잖은 기업들이 여전히 투명하지 못한 인사 원칙과 측근들의 전횡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학연, 지연, 혈연을 배제한다고 공언하면서도 결국은 내 편, 네 편으로 가른다. 운이 좋아 줄을 잘 서면 승진이고 그렇지 못하면 퇴출인 로또 같은 인사가 판을 친다.
연말 인사철을 앞두고 재계가 뒤숭숭하다. 벌써부터 누가 밀렸느니, 끈이 떨어졌느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다. 인사에 실패한 조직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권력을 좇는 해바라기보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들풀' 같은 인재들이 승진하는 인사를 기대해본다.
이정일 기자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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