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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딸깍발이]충무로 한복판에 풍랑이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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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스물다섯살. 그가 처음으로 '충무로'라는 땅을 내디뎠던 나이다. 그리고 다시 25년이 흘렀다. 바로 10월11일이다. 처음 충무로에 닿던 날 그는 막 군대를 만기제대하고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직 세상을 옳게 바라볼 만큼 성숙되지 않았으며 인생의 진로도 잘 알지 못 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했던 상태로 군 전역식을 마치자 곧바로 달려왔던 곳이 충무로다. 그는 지금 충무로에서 매일매일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오늘 1986년 10월11일. 25년전의 그를 만나러 가 봤다.

- 그날 충무로에 와 본 첫 풍경은 어떠했는가 ?
▲ 충무로에 도착한 시간은 세시경. 환영사는 참으로 거창했다. 충무로역이 온통 시끄러웠다. 역앞에는 '평화의 댐' 모금 행사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안보태세 강화하자"며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나온 아나운서는 커다란 카메라앞에서 성금 내는 이들을 인터뷰하느라 분주했다. 모두들 심각한 표정였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트려 수공을 펼쳐 서울이 물바다 된다고 난리였다. 비로소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소란한 세상이 무척 낯설었다. 누구나 30개월동안 군대라는 닫힌 세계에 살았다면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이러다 다시 군대로 불려가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의 환영사가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조작한 것이었다는 걸 아는데 몇년 걸리지 않았다.
- 그날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날은 군에서 제대한 날이다. 해병대에서 30개월 만기제대했다. 군대라는게 남자들에게는 철들게 하는 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 철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들은 다들 군대 다녀온 후 인생이 좀 달라진다. 나도 그랬다. 군대 말년 고민이 많았다. 그게 철든 것이라면 철든 것일 수 있다. 이십대 중반에서야 그런 고민을 할 정도로 난 늦었다. 답답했다. 고향 가서 농사 지어야 할지, 도시로 나와 직장을 가져야할지 답이 없었다. 친구들은 이미 대학을 마칠 때가 됐다. 일찍 자립한 친구들은 기술자가 돼 있었다. 난 그동안 해놓은 것도 없고, 진로도 막연했다. 아무튼 그날 아침 군 사령부 연병장에서 제대식을 마치자마자 충무로로 달려왔다.

- 왜 왔나 ?
▲ 제대하기 한달전부터 나는 부대에 홀로 남아 있었다. 해안경비로 모두 부대를 떠나서 난 병사에 혼자 남아 제대날을 꼽고 있었다. 그때 신문에서 본 영화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닥터지바고였다. 고등학교 때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제일 먼저 읽었던 책은 '이반데니 소비치의 하루'와 '닥터지바고'였다. 러시아에 관한 건 다 좋았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은 것도 1학년때였다. 당시 영화 '닥터 지바고'는 내게 있어 최고의 영화였다. 충무로에서 본 '닥터지바고'는 리메이크된 것으로 대한극장에서 상영했다. 제대하면 반드시 봐야겠다고 한달내내 별렀었다.

- 굳이 그 영화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
▲ 그렇다. 하지만 간절했다. 말하자면 목마름같은거다. 제대하면 무얼하고 살아야할지 걱정이 많았던 때다. 그런 걱정, 목마름들이 모여서 닥터지바고에 꽂혔던 것 같다. 다 매진돼서 아홉시 넘어 마지막 회를 봤다. 눈덮힌 벌판과 얼음집, 새하얀 세상, 전쟁과 공포의 한복판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 주인공들, 유리아틴의 오두막집과 서리 낀 창문, 늑대 울음, 꽃병에서 잎을 떨구던 해바라기들... 멋지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헌데 내게도 영화같은 인생이 펼쳐질 지, 간절한 사랑이 이뤄질 지..."(지금 그의 컬러링은 '라라'의 테마곡이다)
- 영화를 보고난 후 무엇을 했나 ? 
▲ 무작정 용산역을 향해 걸었다. 고향엘 가자면 거쳐야하는 길이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도 간절했다. 가다보니 곧 남대문시장에 닿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옷 보따리를 든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오갔다. 회현상가쯤으로 기억된다. 포장마차에 들러 국수를 먹고 소주를 마셨다. 새벽 세시경이 되자 추웠다. 목도 아팠다. 매연때문일까 ? 드디어 풍진 세상에 몸을 맡겼다는게 실감났다. 서울역 벤치에 와서 누웠다. 주변에 신문지를 덮은 노숙자도 보였고, 짐을 들고 기차에서 내린 사람도 있었다. 새벽을 보내고서야 용산터미널에 가서 고향행 버스를 탔다.

- 충무로에 첫 발을 내딛기전에는 어땠나 ?
▲ 나는 어려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다. 해지는 서쪽 바다와 아산만을 보고 컸다. 꼭 어른이 되면 바다에 나가 거칠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항해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릴적 제일 좋아했던 책 역시 탐험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구나 우주에 관한 책도 다 좋았다. 중학교 1학년 때 '북극너머 지구속 비행일지'라는 책을 읽었다. 지구 내부가 텅 비어 있다는 '지구공동설'에 관한 내용였다. 흥분되면서 떨렸다. '그런 세상이 있다니...' 마젤란으로부터 피어리, 아문센 등 탐험가는 모두 내게 영웅이었다. 그 영웅들처럼 지구 내부를 탐험하는 꿈을 꿨다. 어떤 연유로 나는 항해사가 되는데 결격사유가 있다는 걸 안 건 고2 말였다. 화가 났다. 아팠다. 무력했고, 판단이 흐려졌다. 그래서 청춘이 상어에 찢긴 참치처럼 너덜거렸다. 방황하다 나중에 해병대 간 연유이기도 하다.

- 그 방황과 충무로가 무슨 연관 있나 ?
▲ 연관이 있다. 난 스물다섯살였고, 방황을 끝내야하는 시기였다. 아프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또한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진지하게 고민해야했다.방황하는 청춘을 마감하고, 새로운 25년을 나아가야했다. 그것을 충무로에 처음 와서 '닥터지바고'를 보며 시작한 셈이다.

- 지금의 충무로는 어떤가 ?
▲ 2년전 회사가 여의도에서 사옥을 이전하던 날 이곳으로 왔다. 2009년 12월27일이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연휴 끝였고, 우리는 짐 풀고, 각종 시스템을 점검해야했다. 난 그날 성남 복정역에서부터 충무로까지 걸어서 첫 출근을 했다.새벽부터 탄천과 한강, 청계천변을 걸어 왔다. 오후에 눈 내렸다. 25년전 충무로는 웅장하고 거대하고 위압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첫 출근하던 날 지치고 찌들고 황량한 느낌였다. 낡은 인쇄골목과 먹자거리, 항상 어수선하고 바쁜 사람들 뿐였다. 지금도 삶의 여유같은게 없어 보인다. 간혹 이곳을 떠나게 되는 날을 그려본다. 그 땐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 인생이 달라져 있을거다. 오늘 난 25년전 그랬던 것처럼 인생을 다시 시작되기를 바란다. 간혹 세종로나 을지로의 거대한 빌딩숲을 바라본다. 거기 거친 바다 한복판으로 작살 하나 들고 거칠게 배를 몰아오는 상상을 한다. 풍랑속에서 정박할 항구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 25년새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
▲ 난 청년에서 중년으로 바꿨다. 그동안 농사도 짓고, 재수하고, 대학 마치고, 직장과 가정을 가졌다. 88올림픽, 소비에트의 붕괴, IMF 구제금융,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월드컵,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화해협력, 인터넷과 IT혁명 등을 겪었다. 나 또한 386세대로 군사독재시대로부터 민주주의로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왔다.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산 셈이다. 그렇다고 그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다. 또한 내가 그것들에 주체적이거나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은 아니다. 단지 겪었다. 그새 내 목록에는 차, 집, 아내와 아이들, 대학졸업장, 재수한 경력 등이 추가됐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처음 오던 날 닥터지바고를 보면서 주인공같은 인생을 꿈꿨던 건 사실이다. 다만 내 인생에서 절대로 빼앗길 수도, 잃을 수도 없는 가치가 있을 것이며 그것을 반드시 지켜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 앞으로 당신이 살아갈 날이 오늘 하루 뿐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
▲ 나는 마저 못 읽은 책을 읽고, 기사와 자서전의 서문을 쓰고, 잠시 사색하며 이성이 가장 맑은 상태가 되도록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그리고 남은 시간 벗들에게 편지를 쓰고, 묘비명을 작성한 후 천천히 걸어야겠다. 걸으면서 멈추는 곳이 내가 마지막인 곳이기를 바란다.

- 자서전을 쓰겠다고 ? 난 반대한다.
▲ 왜 반대하나 ? 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 인생을 스스로 변호할 수 없다. 그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25년후에 자서전을 쓰려 하지마라. 무엇을 말하겠다는 건가 ? 침묵이 옳다.
▲ 후회되는 일이 많다. 그중에서도 제대 이후 고향 형님들과 농민회하기로 하고선 대학가겠다고 혼자 도망친 일이다. 형님들에게 늘 미안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했고, 그곳에서 그들과 살아야했을거라고 무수히 되뇌었다. 더 나은 세상,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 같이 가자고 약속한 이들였다.난 아직 돌아가지 못 했다. 그래서 여전히 내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젊어서 꿈에 사로잡혀 있었고, 커서는 빚진 심정에 짓눌렸다.

-지금이라도 갚을 길이 없나 ?
▲ 방법을 모르겠다. 열심히 살아내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는게 아니다. 꼭 찾아내서 그들에게 가고 싶다.

- 다시 25년 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은가 ?
▲ 넓은 벌판, 숲과 작은 집이 있는 곳에서 농사짓고 있을 것 같다. 그런 꿈을 꾼다. 고향집이 연상되기는 한다. 거기 형님들이 나즉히 손을 흔들고 있다. 그들 곁에서 조용히 책 읽고, 글 쓰고, 농사 짓고 자급자족하면서 머물고 싶다. 그곳은 다시 25년을 항해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나의 마지막은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생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연에 동화돼 병마와 노쇠함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을 그리곤 한다. 25년 후 나는 또 다른 충무로에 닿아 항해를 멈출 것이다. 그때까지 어떤 풍랑이 있을지 벌써 가슴 뛴다.

- 그럼, 소년였을 때 꿈꿨던 세상 끝으로의 항해는 어떻게 되는 건가 ?
▲ 이제 항해가 다시 시작된다. 지금 충무로에서 거친 바다를 본다. 거기 난 배를 띄워놓고 있다. 빛나는 항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캄캄한 밤바다, 조각배 하나 거친 풍랑에도 북극성이 있는 한 길을 찾아 내리라.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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