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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딩동'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웬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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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주연 기자] "자, 다같이 구호를 외쳐봅시다. 영업의 80%는 사전 계획에 따라 이뤄진다!"

LG생활건강의 오휘 방문판매 화곡지점에는 주부 4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LG생활건강 화장품 매출의 35%를 차지하는 방문판매원이다.
오휘 방문판매원들만 전국에 총 1만4000명이 있을 정도로 화장품 판매에 있어서 방문판매 경로를 통한 영업은 매우 중요하다.

2조4000억원대인 국내 화장품 방문판매 시장을 주름잡는 방문판매원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LG생활건강 오휘 방문판매 화곡점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방판사원 주부들

LG생활건강 오휘 방문판매 화곡점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방판사원 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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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조례시간. 전일 실적 공개와 동료들의 판매비법 전수가 이어져 긴장되는 순간이다.

"영양크림 한 개에 30만원짜리 쓰는 여자들을 보고 '남편 등골 빼먹는 여자'라고 생각해 쉽게 권하지 못했었어요. 그런 제게 오히려 고객들이 먼저 00제품 없냐고 묻더라구요. 여러분, 비싼 것 판다고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주부 한명아(35)씨는 동료들에게 전일 38만원짜리 환유 동안고 세트를 판매한 노하우를 발표하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한 시간가량 조회가 끝난 후 11시부터 본격적인 영업이 시작된다.

11시 30분. 나인옥(50) 화곡지점 이사는 화장품 샘플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인근 병원을 찾았다. 간호사들은 화장품 주치의를 만난 듯 서로 다 쓴 화장품과 최근 피부 트러블에 대해서 앞다투어 얘기했다.

간호사 이근옥(46)씨는 "직업의 특성상 따로 화장품을 사러 갈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방문판매를 많이 애용한다"며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제품에 대해서만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점이 방판의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고객에게 1:1로 오휘 제품을 설명하고 있는 나인옥 방문판매원(오른쪽)

고객에게 1:1로 오휘 제품을 설명하고 있는 나인옥 방문판매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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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는 얘기도 하며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쌓을 수 있다는 점도 화장품 매장에서 사는 것보다 매력적이다.

"딸아이가 나이가 다 찼는데도 결혼에 생각이 없다고 해서 미치겠어. 가방끈만 길어서는…이번에는 유학을 가겠다지 뭐야. 어디 중매 설 곳 없어?"

점심시간 이후 찾은 한 단골식당. 나 이사는 판매할 화장품 대신 자식 결혼 문제를 도마 위에 꺼냈다. 화장품 판매에 앞서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방문판매의 제1원칙이기 때문이다. 자식 자랑, 남편 흉, 휴가지에서의 에피소드 등을 줄줄 늘어놓다가 신기하게 마지막에는 화장품으로 화제가 바뀐다.

"세상에…휴가 다녀와서 다 탄거봐. 그대로 두면 피부가 낙엽처럼 바스락 거리면서 건조해져. 수분 크림 써야겠네"

지금까지 백화점에서 한번도 화장품을 사 본적이 없다던 식당 주인은 어느 새 카드를 꺼내와 화장품 값을 지불했다.

유능해 보이는 그녀라도 일하다 보면 낯선 이들에게 상처받을 때도 있다.

"이봐요, 이것 다 치워요. 가져가라구!" 오후 3시 반. 무조건 화장품을 들고 찾아간 한 식당에서 주인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한 달 매출이 6억~7억원에 이르는 주유소 사장이었던 나 이사는 "처음 화장품 방문판매원이 되었을 때 나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또 '화장품 아줌마'라는 말을 들으며 서럽고 고된 나날을 이기지 못 한 10명 중 8명은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관둔다고 귀띔했다.

세 곳 돌았을 뿐인데 시계는 벌써 5시를 알리고 있었다. 영업이기 때문에 끝나는 시간은 고정된 게 없다. 고객이 편한 시간대라면 저녁에라도 찾아간다. 그만큼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VIP로 대접을 하고 있는 셈.

업계에서는 해외 화장품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들어올 때 가장 장벽으로 문제 삼는게 '방판'이라고 평가한다.

박준섭(53) 화곡점 대표는 "한국 화장품 시장이 현재와 같이 외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시판 규모의 2~3배인 방판의 힘, 한국 아줌마의 힘"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2005년에는 오휘라는 제품을 알던 사람이 열 명 중 두 명 있을까 말까했지만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광고 효과도 있지만 화장품 방문판매 사원들이 1:1로 고객들을 만나면서 제품을 설명해준 덕"이라고 설명했다.

오후 5시 반. "영양크림이 떨어졌거든 기자님도 제게 연락하세요. 에프터 서비스는 확실하게 해드릴테니"

나 이사는 사무실로 복귀하면서도 잊지 않고 잠재 고객 하나를 더 유치했다. 과연 화장품 시장 키운 건 팔할이 바람(女風)이다.



오주연 기자 moon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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