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김화선(86) 할머니가 즐겨보는 것은 케이블 TV의 이종격투기 프로그램이다.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주먹을 주고받으며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며 그는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맞고 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게 해 주겠다'며 자신을 위안부로 팔아 넘긴 사람들과 자신에게 폭행과 핍박을 퍼부었던 일본군을 때려주는 듯한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이따금씩 "일본군이 나를 잡으러 온다"며 한밤중에 꾼 악몽을 현실처럼 얘기한다.
그나마 이동진료 현장을 찾은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상처는 '비통한 역사' 그 자체라며 결국 잘못된 역사를 치료해야만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부가 베푼 의료봉사는 그들의 상처를 달래기에 역부족이었다. 정부의 손길을 거부한 할머니들의 심정은 진료접수를 하고도 현장에서 끝내 진료를 포기한 배춘희(89) 할머니의 말에 잘 나타났다. 지난 주 서울 아산병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기로 했다가 "누구에게도 내 몸을 맡길 수 없다"며 수술을 포기한 배 할머니는 같은 이유로 이 날도 진료를 거부했다. 수치심과 비통함은 이들의 허탈감을 키웠고, 마음의 상처는 불신을 부채질했다. 일본군의 칼질에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에 상처를 입은 김군자(87) 할머니는 "그때 아프고 피가 흐르던 장면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생생하다. 몸의 상처가 아물어도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는 말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요사이 무릎이 아파 급한대로 관절약을 처방받은 이옥선 할머니, 심장약을 처방받은 김화선 할머니도 "우리 마음에 난 상처는 어찌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 겸 경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내면 상처는 무엇보다 깊어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심지어 나눔의집에 거주하는 8명의 할머니들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나누려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할머니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들의 불명예스런 과거를 청산하고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가 컸는데 매번 실망하게 되자 '절대적 불신'은 더욱 강해졌다"며 "점점 고령화되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죽고 나면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일본이 말하는 대로 자신들이 접대부로 영원히 전락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자주 표현한다"고 전했다.
박은희 기자 lomo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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