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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의 역발상] 선진기업은 모두 '공정'한가?

최종수정 2010.11.28 11:30 기사입력 2010.11.2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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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김희정, 
미국변호사</b>

김희정, 미국변호사

이른바 '특정목적 부합성(fitness for particular purpose)'이란 걸 아시는가.

법률용어 중 물품거래 계약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인데, 미국에서는 '통합상법전(Uniform Commercial Code)' 2-315에 나온다. 나는 미국 로스쿨에서 통합상법전(Uniform Commercial Code) 과목을 매우 좋아했다. 이 과목을 모두 이수하면서 큰 지적 즐거움을 느꼈다. 특수목적 부합성이란 딱딱한 말보다 발음부터 부드러운 'fitness for particular purpose'에 나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구매자라면 판매자에 꼭 요구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일단 계약을 하게 되면 건설계약이든 물품판매계약이든 보증(warranty) 수준을 양 당사자가 결정하기 마련이다. 물론 기간이나 금액 등은 별도로 합의하게 된다. 이때 특정목적 부합성이 애용된다.

굳이 어려운 용어 얘기를 꺼낸 건 화학회사를 다니다 엔지니어링 회사로 새롭게 옮긴 후 힐러리에게 찾아온 곤혹스런 사건이 관련돼 있어서다.

입사 후 나를 교육하러 해외에서 날아온 사람이 있었다. 전직 경리 25년 출신 중국인 여성 디렉터였다. "와, 참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일견 들었다. 얼마나 경리업무를 열심히 했으면 법률전문가가 다 됐을까, 비싼 등록금 내고 미국 로스쿨에서 배워봤자 이런 사람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경외감마저 밀려왔다.
그런데 이 디렉터가 '특정목적 적합성'을 그리도 싫어할 줄이야…. 그는 '시간엄수는 필요의무(time is of the essence)'와 이 버르장 머리없는 '특정목적 부합성'이란 단어에 빨간 줄을 좍좍 긋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우리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오직 '일반용도 적합성', 즉 'normal use'만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직장이 무엇을 판매하는 회사인지 며칠사이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여서 그 경리출신 법률전문가와 옆 자리의 CEO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가 파는 것이 그렇게 첨단 제품은 아닌가봐요?(What we are selling is, probably not cutting edge?)" 명랑한 성격의 CEO는 "우리가 파는 건 모두 최첨단이지(Everything we sell is cutting edge!)라는 유쾌한 대답을 해줬다.

이때부터 나의 가시밭길 직장생활이 예고된 것 같아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디자인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회사 보호를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조항이라나….

'특정목적 부합성'이란 용어가 모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상법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구매자와 판매자의 해석의 상이함을 부드럽게 완화해주면서 즐겁게 거래(deal)를 해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엔지니어 출신의 CEO는 차치하고라도 법률전문가마저 어찌 UCC 2장 물품판매법(Sales law)에서 가장 유명한 'fitness for particular purpose'를 한번도 인터넷에서 찾아보지도 않았다는 것인가. 이런 사실을 믿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물품 판매회사가 일반용도만 보장하게 되면 구매자가 우리 제품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건 너무나도 명확하다. 왜냐하면 일반목적이란 '비누는 세척용이고 식용이 아니다'는 수준에 불과해서다.

사실, '특수목적 부합성'이란 의미는 단지 판매자가 구매자의 용처를 알고 있으며, 구매자는 판매자의 기술과 지식에 의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디자인 하자를 책임지거나 제조물 책임법에 의한 수준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으로 상관습(trade customs)은 거의 동일하다. 한국법에서나 영문계약에서나, 준거법이 달라도 마찬가지다. 엔지니어링 제품을 공급하면서 어디 쓰이는 줄 몰랐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가. 설계도를 보고 최적화해서 물품을 넣어주는데 일반용도만 보장해주겠다니….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별 소용이 없으리라는 직감이 순간적으로 왔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은 내 머리속에서 빠르게 번지는 것일 뿐, 적절하게 전달해서 이해시키기엔 버거웠다. 법 조항을 보여준다고 '회사 보호'라는 고정관념에서 쉽게 벗어날 그들이 아니었다. "판매에 급급해 구매자만 보호하려 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웠다. 세계적이라는 기업의 법률지식이 그리 해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나 할까.

특정목적 부합성은 세가지 요소로 성립된다. 첫째, 판매자는 구매자의 구매 목적을 알 이유가 있을 것(a reason to know)이다. 이는 정확히 알았음을 어느쪽도 증명할 필요없는 아주 낮은 수준의 지식을 이야기한다. 세탁기로 치자면 빨래방 용도인지 가정용인지 정도는 판매자가 알아서 구분해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둘째, 판매자가 그 정도 구분할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구매자가 판매자의 노하우에 의존했을 것이다.

다시말해, 힐러리가 빨래방을 차리려고 세탁기를 샀는데 가정용을 사가지고 왔다고 치자. 그런데 그 판매자가 중고품 상인인 것을 알고 있었다면 판매자의 실력에 의존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경우 '특정목적 부합성'은 그 판매자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어찌보면 단순한 법률용어인 '특수목적 부합성'은 어느정도가 공정(fair)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영어사용에 문제가 전혀 없는 외국기업들조차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게 대개의 사람들 마음일까?

힐러리 앤드 톰슨 파트너스 대표(hjthomp@hotmail.com)

*김희정 씨는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인턴생활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굴지의 L그룹에 이어 외국계 기업의 법률 전문가로서 활동해오다 최근 '힐러리 앤트 톰슨 파트너스'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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