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1990년 봄. 서재혁이 다니던 교회는 떠들썩했다.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밴드 ‘검은 장미’의 베이스 진영성이 성가대 지휘자로 발령받았다. ‘검은 장미’는 서재혁의 우상이었다. ‘무궁화’, ‘호랑나비’와 함께 서울의 3대 밴드로 손꼽혔다. 독학으로 베이스를 배운 서재혁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설레었다. 고수에게 솜씨를 인정받을 것 같았다.
괜한 자신감은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음악 장비를 다뤘다. 어쿠스틱, 일렉, 피아노, 드럼…. 연주는 모두 능수능란했다. 베이스로 눈길을 돌린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절반 값에 친구의 베이스를 넘겨받고 매일 연습에 몰두했다.
모든 학습은 독학이었다. TV 음악 프로그램이 그나마 있는 교본이었다. 이문세, 이태윤, 송골매가 출연하는 영상을 녹화해 몇 번씩 돌려보며 따라했다. 그렇게 익힌 슬랩 주법 등은 자랑거리가 됐다. 늘 친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쏟아지는 부러운 시선. 서재혁은 조금씩 기고만장해졌다.
진영성은 서재혁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자질이 부족하다 여겼다. 이유는 길고 굵지 않은 손가락. 서양악기를 다루는데 불리한 신체조건이었다. 계속되는 무관심. 그는 오기가 발동했다. 자신감을 회복하고 싶었다. 독한 마음을 품고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여름방학에 참가한 수련회는 그 출발선이었다. 새벽 5시부터 해 질 무렵까지 베이스를 연주했다.
“하루 평균 18시간 동안 베이스와 함께했다. 아마 찬송가는 거의 다 연주했을 거다.”
음악에서의 승승장구. 대신 학교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학급 내 5등을 유지하던 등수는 40등 이하로 떨어졌다. 서재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울예전에 진학해 음악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제는 집안의 반대였다. 어머니는 장남이 대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회사원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공부에 전념시키려고 더 좋은 환경으로 이사를 강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의 의지는 완강했다. 그래서 조건을 달았다. 4년제 대학교을 진학하면 음악장비를 사주겠다고 했다. 구미가 당긴 서재혁은 서울예전을 포기했다. 대신 수원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약속대로 손안에 들어온 기타와 컴퓨터. 물리학 책이 든 가방은 눈에서 멀어졌다. 처음부터 잘못된 협상이었다. 이전의 꿈은 다시 몰래 자라나고 있었다.
$pos="C";$title="";$txt="1981년 3월 4일 서재혁이 석남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꽃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size="504,718,0";$no="2010060411515538131_2.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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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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