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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경제학]싸인펜 파는 할머니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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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용 컴퓨터싸인펜 수정테이프 준비하세요"

마포구 서울여고의 텝스(TEPS) 시험장.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한 할머니(유 모씨·72)가 시험 준비물을 팔고 있다.
플라스틱 통을 엎어놓고, 그 위에는 두꺼운 스티로폼 조각을 올려 진열대로 삼았다.

이날의 주요 물품은 컴퓨터용 싸인펜(1000원)과 수정테이프(2000원). 4B연필과 손목시계 등도 있지만 오늘따라 하나도 팔리지 않는다.

"원래 이 영어 시험에는 컴퓨터용 싸인펜이랑 수정테이프가 필요해"
4B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가 대뜸 말한다. 연세도 있으신데 어떻게 시험마다의 특징을 잘 아느냐고 물으니 "그거 모르면 장사 어떻게 하나"란 답변이 돌아온다.

할머니는 오늘 새벽 4시반 경에 일어났다. 자택인 연신내에서 이곳 시험장까지 이동하는 시간, 하루 매출을 예상해 물건을 챙기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그 즈음에는 일어나야 한다. 일찍 도착할수록 좋은 자리도 선점할 수 있다. 좋은 자리를 위해 평소 학교 경비아저씨와 친분을 쌓는 것은 필수다. 할머니는 "저번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장사하지 말라고 그러더니, 오늘은 진열대(스티로폼, 플라스틱 통)까지 줬다"며 "이제 이 학교를 단골로 삼아야겠다"고 말한다.

오전 7시~8시. 장사를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아직 학교로 들어오는 학생은 몇 명 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이 시간이 가장 지루한 시간"이라며 연신 하품을 한다.

9시가 다가오자 학생들이 한두명씩 교문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컴퓨터용 싸인펜을 준비하라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지나쳤던 학생도 발길을 돌린다. 잊고 있던 준비물이 생각난 모양이다.

할머니는 "요즘은 다들 준비성이 철저해서 옛날보다 안 팔린다"며 "펜 사는 학생들은 정말 잊고 와서 사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한두개 더 구비해 놓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가끔 비싼 가격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는 학생도 있다.

"에이 할머니 1000원이라고 써있는데 2000원에 팔아요? 너무하다"
"이거 좋은거야. 저쪽에 있는 데서 사면 3000원이야"
볼멘소리를 하던 학생도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한시가 급하니 순순히 2000원을 내고 수정테이프를 사 간다.

차를 타고 교문을 들어오다 창문을 내리고 할머니를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할머니는 얼른 뛰어가 펜을 건네고 돈을 받아온다.

오늘 시험 시작 시간은 오전 10시. 9시반을 넘어서자 할머니 모습이 초조해보인다.

"시간이 다 되가네"
싸인펜과 수정테이프를 사 가라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 이제는 거의 외침에 가깝다.

시간이 다 되어서야 교문을 들어오는 학생을 보고서는 "그러게 빨리 빨리 오지...."라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험이 시작됐고, 이야기를 청하자 할머니는 본인이 깔고 앉아있던 비닐을 내준다.

할머니의 요즘 가장 큰 관심사는 '시험정보'다. "예전에는 본인이 아는 상인들과 전화통화를 통해 정보를 얻었는데 이제는 젊은 상인들이 인터넷이란 걸 쓰더라"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또 "어제는 인창고등학교에 은행 시험이 있었는데, 다른 곳이랑 겹쳐서 못 갔다"면서 한숨을 쉬기도 한다.

"할머니 요즘 언론사 시험도 있어요. 거기는 안 가세요?"라고 묻자
"요즘 기자시험장에는 회사에서 펜같은거 다 갖다줘. 우리가 가도 별로 팔질 못해"란다. 물건이 잘 팔릴 수 있는 시험을 뚜렷하게 파악하고 있는 할머니다.

이제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까 건넨 명함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내가 다음에 전화할테니까 시험 정보 있으면 알려줘야 해. 인터넷으로 보고"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공수민 기자 hyunhj@asiae.co.kr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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