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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5주년' 동방신기가 풀어낸 뜨겁고 치열한 회고담①

최종수정 2008.12.29 10:38 기사입력 2008.12.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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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신문 이혜린 기자]

데뷔와 동시에 정상에 올랐다. 더 이상 올라갈 때가 없다 싶을 때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그 시장에서 인정을 받자마자 돌아와 원래 정상의 자리를 지켜냈다. 누군가는 훌륭한 외모와 맹목적인 팬덤 덕에 얻은 결과라고 폄하하고, 누군가는 아시아를 들썩이게 하는 유일한 그룹이라고 추앙한다. 호불호를 떠나 어딜 가든 뜨거운 감자다. 데뷔 5주년을 맞은 동방신기 이야기다.

지난 26일 동방신기의 데뷔5주년 기념일은 특별했다. 이날 스케줄은 5주년 기념 팬미팅과 KBS '뮤직뱅크' 방송. 동방신기는 팬미팅에서 여전히 뜨거운 팬들의 사랑을 재확인했고, '뮤직뱅크'에서는 2008 MVP를 차지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던 동방신기를 대기실에서 살짝 만나 뜨겁고도 치열했던 지난 5년을 함께 추억해봤다. 동방신기는 매 순간, 순간을 정확히 기억해내며 기자가 조사해온 자료를 무색케 했다.

# 2003년 데뷔 - 통통한 스피어스와 미끄러진 시아준수

동방신기의 공식 첫무대는 2003년 12월26일 SBS에서 전파를 탄 '보아&브리트니 스페셜'이었다. 당시 최고의 팝스타였던 스피어스의 내한에 맞춰 기획된 스페셜 방송. 동방신기는 보아의 후배 자격으로 데뷔신고식을 치를 수 있었다.

"우리가 방송 시스템을 전혀 모를 때였잖아요. 9일에 녹화를 했는데, 방송 날짜가 안잡히는 거예요. 방송 안하는 줄 알고 걱정 많이 했죠.(웃음) 방송이 시작돼서도 걱정이 많았어요. 우린 분명 스피어스와 보아 선배님 무대 중간에 등장해서 노래를 했거든요. 그런데 보아 선배님이 먼저 나오는 거예요. '우리, 편집 당했구나!' 싶었어요." (유노윤호)

"엔딩에 우리가 나왔는데, 다들 잘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제일 잘 한 것 같아요.(웃음)"(영웅재중)

"그때 준수형이 혼자 미끄러졌었죠. 클로즈업 부분에서."(최강창민)

"무대에 눈을 뿌려서 많이 미끄러웠어요. 꽈당 넘어진 건 아닌데, 표정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게 너무 많이 드러났어요. 그래도 저였기 때문에 그 정도였지, 다른 멤버였으면 넘어졌어요, 정말."(시아준수)

"그렇죠. 운동신경 좋은 시아준수는 넘어질 뻔 하고, 그렇지 못한 우린 다 잘했죠.(웃음)"(유노윤호)

사실 너무 긴장을 해서 어떻게 촬영을 마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방송국에서 만난 스피어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을 정도다.

"첫방송이니까 많이 긴장되잖아요. 그래도 좀 나았던 게, 스피어스가 그때 조금 통통하셨거든요. 그래서 크게 실감이 나진 않았어요.(웃음)"(믹키유천)

"너무 먼 세계의 사람이라 감이 안오는 것 있잖아요."(시아준수)

"첫방송 나가고 나서 '와! 우리도 연예인이다!'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집밖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우리를 못알아봤다는.(웃음)"(유노윤호)

# 2004년 '허그' 발표 - "아이돌, 모두가 안될 거라 했다"

2004년 초 데뷔싱글 '허그'를 발표할 때만 해도 동방신기의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 세븐, 이효리 등 솔로가수들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데다, 아이돌그룹은 god, 신화 이후로 막강한 팬덤을 가진 후속그룹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또 한번 아이돌그룹을 데뷔시킨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팔짱을 끼고 얼마나 잘되나 보는 것'에 가까웠다.

"그때 가요계에선 아이돌이 통하지 않는다고들 했어요. 그래서 외부에서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죠. 아이돌 시장을 다시 어떻게 해보자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데뷔하자' 뿐이었어요."(유노윤호)

회사 내부에서 동방신기의 별명은 'SM5 드림팀'이었다. 데뷔를 준비하던 각 그룹의 리드보컬감들을 모아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동방신기가 체감하는 부담감도 컸다.

"그때 MBC 음악프로그램에 '이달의 신인'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우리가 2월의 신인이었는데, 정말 거기에 뽑혀야 한다는 부담이 컸었어요. 신인이 공중파에 나가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거기 뽑히면 다음 5주간 그 프로그램에 매주 나갈 수 있었거든요."(믹키유천)

가요관계자들의 예상은 보기 좋기 빗나갔다. 10대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동방신기는 '허그'로 순위프로그램에서 1위를 휩쓸었고, 그해 신인상 조차 '생략'한 채 본상 수상자가 됐다. 일부 시상식에선 신인상과 본상을 함께 수여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처음이었다.

"사실 데뷔곡으로 그렇게 사랑받았다는 게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데뷔 전에 고생하는 거야 모든 가수들이 겪는 것이고, 데뷔 후엔 정말 무명시절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후 일본에 가서, 그 설움을 톡톡히 겪게 되죠."(영웅재중)

# 2006년 그랜드슬램 - 연말시상식과 장판 깔린 대학 강당

동방신기는 2006년 명실상부, 가요계 정상에 올랐다. 3집 '오정반합'으로 그해 최고 기록인 34만장 판매를 기록했고, 연말 시상식의 대상이라는 대상은 모두 휩쓸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어른들은 동방신기 멤버 이름을 외우느냐로 '신세대 수치'를 측정했고, 대중매체는 '인기스타' 대신 '동방신기'를 보통명사처럼 사용했다. 네글자 식 작명법은 '야동순재' '거성명수'의 탄생 등 여타 대중문화에도 큰 파급력을 자랑했다.

"그때 우리 목표는 우리의 색깔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의견이 반반이었던 것도 같아요. 좋아해 주시는 분들과 아닌 분들이 극명히 나뉘었죠. '허그'의 성공이 사람들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듯이 '오정반합'의 성공 역시 '의외다'라는 반응을 낳았죠. 물론 팬들의 힘이 정말 컸어요. 그리고 우리도 그 어느때보다 독기를 품고, 열심히 했었고요."(유노윤호)

기쁨보다는 고생이 더 기억에 남기 때문일까. 대상 수상으로 인한 환희에 오래 머무를 줄 알았던 대화 주제는 금방 일본에서의 고생담으로 이어졌다.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동방신기는 일본에서 '무명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국에서 대상 받고, 다음날 일본에 가선 무료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일본에서 정말 밑에서부터 시작했거든요. 그때 오기가 생겨서, 더 단결하지 않았나 싶어요. 대상받았다고 자만할 여유도 없었죠."(최강창민)

"편하게 할 방법이 없진 않았어요. 토호신기가 아니라 동방신기로 진출해서, 우리 팬들 중심으로 공연 한두번 하고 돌아올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한정된 마니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우리의 음악을 알리고 싶었어요. 고생을 하더라도 제이팝과 경쟁하는 현지화 전략을 쓰게 된 거죠."(영웅재중)

어떤 무대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했더니 멤버 다섯명의 목소리가 일제히 커진다. 지금은 깔깔 거리며 말을 해도, 당시엔 꽤나 고생스러웠던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역시 기억에 남는 무대는 모 대학 강당이었어요. 무대와 객석의 높이 차가 1mm도 안되던, 노란 장판만 하나 깔려있던 곳이요. 공식 행사도 아니고 그냥 우리가 간 거였어요. 500명 정도가 모여있었는데, 아마 뒷자리에선 우리가 보이지도 않았을 거예요.(웃음)"(영웅재중)

"유선 마이크를 쥐고 '오정반합'을 불렀어요. 줄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는데.(웃음)"(최강창민)

"그런데 어떻게 자리를 다 맞추고 안무를 했지? 완전, 고무줄 놀이였어요.(웃음)"(유노윤호)

"명함교환회, 악수회, 아카펠라 시연회, 정말 안한 게 없어요. 일본의 CD숍도 다 돌았던 것 같아요."(믹키유천)

이제 다음 주요시점인 '오리콘 1위'의 순간으로 화제를 돌려야 하는데, 동방신기의 고생담은 쉽게 막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목소리가 더 높아지며, 여러 에피소드가 쏟아져나온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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