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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시대]李 당선자 그의 일대기는?

최종수정 2007.12.19 20:57 기사입력 2007.12.19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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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 신화에서 청계천 신화, 그리고 대권신화까지'


'실천적 리더십'을 내세우며 자신의 길을 걸어온 66세의 이명박 한나라당 당선자가 첫번째 대권도전에서 성공해 향후 5년간 '대한민국호(號)'를 이끌 선장으로 정상에 우뚝 섰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외쳐온 '우리 시대의 컴도저'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가 이제 2개월후면 청와대의 주인으로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갈 대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이 나라 60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이 당선자는 일제시대와 광복, 6.25 전쟁과 자유화, 군사독재정권과 산업화,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로 이어지는 격동의 파고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넘어왔다. 


◇가난, 그리고 어머니
= 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난 4남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 가운데 다섯째였다.

아버지 이씨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인 목부(牧夫)로, 고향사람의 중매로 지금은 대구로 편입된 반야월 출신의 어머니 채씨를 만난 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접살림을 차렸다.

해방 직후 귀국선에 올라 아버지는 동지상고 재단 이사장의 목장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가난은 지겹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집안의 희망은 포항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둘째 아들(이상득 국회부의장)이었고, 자연히 이 당선자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6.25 전쟁을 겪으면서 누나(귀애씨)와 막내(상필씨)를 잃고, 가세는 더 기울었다. 이 전 시장은 술 지게미로 하루 두끼를 때웠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아예 어머니의 풀빵장사를 도우려 길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하려던 즈음 한 은사를 만난 그는 진학의 꿈을 이뤄내기 위해 어머니와 담판을 벌여 "학비는 한푼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냈다. 

결국 동지상고(야간) 수석 합격과 3년 연속 수석을 이뤄내 무일푼으로 고교 졸업장을 받아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이 당선자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대입을 준비했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헐값에 구한 참고서로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다.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근근이 학비를 마련하며 대학을 다녔던 이 전 시장은 3학년 때는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6.3사태의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 '민주화 투사'라는 이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석방 한달여만에 어머니를 잃는 비통을 겪었다.


◇27년간의 현대생활=가난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정주영이라는 기업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대학졸업 후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유로 취직을 할 수 없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청와대와의 담판 끝에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이 당선자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제기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35세에는 현대건설의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의 역사를 쓰게 된다.

특히 목숨을 걸고 현장 폭도로부터 끝까지 금고를 지켰던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사건이나 국보위를 상대로 피눈물을 흘려가며 현대자동차를 지켰던 일은 그의 집념과 투지, 위기에서 발휘되는 특유의 배짱을 입증한다.

20여년간 CEO로 지내면서 돈도 많이 벌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기준시가로만 330억원을 상회하는 이 전 시장의 재산은 현대그룹 시절 중동에서 대형공사를 많이 따내면서 성과급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논현동에 있는 단독주택은 정주영 회장이 손님접대용으로 지어준 것이다.


◇달동네로 간 서울시장 = 민선 3기 시장으로 서울시청에 들어선 이 당선자는 4년간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과 서울광장 조성 등 역대 어느 시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업은 두말할 것 없이 청계천 복원. 취임 즉시 작업에 착수, 불과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 물길을 다시 소통시켰다.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유산 훼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장 문제 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으나 4000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 청계천을 시민 휴식공간, 관광명소는 물론 생태자원의 보고로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그의 치적이다.

그는 그러나 서울시장 재임시절 복지예산을 가장 많이 늘렸다는 점을 청계천 복원 못지 않은 '자랑'으로 여긴다. 스스로 '사회적 약자' 출신으로, 성장기에 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데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라고 한다.


◇'여의도 입성' 15년..그리고 청와대 입성 = 이 당선자가 정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앞서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6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데 '앙심'을 품고 아예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뜯어말렸던 이 당선자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만만치 않았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고, 이 와중에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끝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2002년 삼수만에 서울시청에 입성, 다수의 반대를 꺾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을 성공시킴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 각인시킨 그는 보수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면서 이념, 연령, 계층, 지역에 관계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서울시장 임기중 탄탄한 업적을 바탕으로 한 이명박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한나라당 대선당선자로 당선된 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 번도 주요 여론조사에서 뒤지지 않은 채 선거전 마지막 날을 맞은 이 당선자는 투표를 불과 이틀 남겨놓은 17일 BBK 동영상이 공개되며 위기에 몰렸으나 국민의 변화 욕구와 시대정신은 결국 그에게 '이명박 대통령 시대'의 막을 열게 했다.

서영백 기자 ybseo@news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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