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오후 한 詩

발바닥으로 읽다/조경희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 낸다 고무통 수북이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
2018.08.17 09:17

소녀와 노랑나비/한영수
아리랑 장독대 봉숭아 넙데기 할머니가 기억하는 모국어 열다섯이었다 비행장에서 일했다 헌병이 큰 칼 차고 끌어가기 전까진 착, 착, 착, 군화 소리 지금도 들려, 해방은 더 이상 일본 군인...
2018.08.13 09:50

초보 운전/박현수
아무리 꽉 막힌 도로라도 길은 질식하지 않는다 녹조가 끼지 않는다 죽은 붕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숨 쉴 곳이 길마다 있기 마련이니까 들락거리며 바람을 펌프질하는 사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
2018.08.10 08:49

블루클럽/이성렬
늦은 가을 저녁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나의 텅 빈 시선 끝에, 그곳은 심해에 내려진 어항처럼 홀연히 떠올랐다. 방파제 바깥을 응시하는 밍크고래의 매끄러운 뱃살을 닮은 푸른 간판에 손을 댔...
2018.08.08 09:05

소리/서동균
미끄럼틀 타는 소리 술래잡기하다 넘어진 소리 비석치기하는 소리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는 소리 아이스께끼하고 도망가는 소리 고무줄 끊고 놀리는 소리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팽이에 머리를 맞...
2018.08.06 10:34

괭이밥/김성철
볕 그늘에 앉아 하루 종일 들풀들의 이름이나 지어 줬으면. 당신이 붙인 이름과 내 지은 이름의 차이를 가지고 또 다른 이름 하나 지었으면. 그리하여 고운 이름 하나 얻어 당신 닮은 딸을...
2018.08.03 09:17

넙치/김경후
어둑한 보도블록, 울툭불툭, 넙치 하나, 누워 있다, 그것은 진흙색 바닥보다 넓적하게, 깊게, 바닥의 바닥이 되고 있는 중, 가끔, 이게 아냐, 울컥, 술 냄새 게운다, 뒤척인다, 하지만 다시, 눌...
2018.08.01 10:04

오동나무 나이테 CD/반칠환
가슴속 둥근 오선지에 천 마리 새가 앉아 있지. 옹이 버튼 누르면 참새 한 떼 날아오지. 짝짝짝 박수 치고 짹짹짹 노래하지. 잔잔한 바람 불면 파랑새도 날아오지. 팔랑팔랑 날아와서 파랑파랑 ...
2018.07.30 10:05

세족/조명
바다가 섬의 발을 씻어 준다 돌발톱 밑 무좀 든 발가락 사이사이 불 꺼진 등대까지 씻어 준다 잘 살았다고 당신 있어 살았다고 지상의 마지막 부부처럼 섬이 바다의 발을 씻어 준다. ■해 저...
2018.07.27 09:48

나비 한 마리/노향림
베란다 문을 열자 나비 한 마리 날아들어 온다 한 뼘의 하늘이 얹혀 있다 다시 문 활짝 열어도 날아갈 생각을 않고 호접란 짙은 향기 속에서 미동도 없다 날개를 접어도 슬픈 날개를 안 접어도 ...
2018.07.25 09:14

여름 글자 필요 없어/정재학
아들이 나를 닮아 수박을 좋아한다. 수박 때문에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 글자를 써 달라고 한다. '여름'이라고 써 주자 그림책을 가져와 무성한 푸른 잎을 거느린 나무 그림을 보여 주며 여름 ...
2018.07.23 13:05

병어/주병률
아직도 어린 딸인데 늦은 밤 편의점에서 시급으로 받은 돈으로 아빠가 먹을 거라고 병어회 한 접시를 사 왔다. 병어는 봄, 연안을 방금 헤엄쳐 온 듯이 은박지처럼 반짝거리고 나는 납작하니 낡...
2018.07.20 08:32

오래된 제사/박정남
슬프다는 것은 말간 백지가 오는 것이다 말간 술 한 잔 막걸리 잔 하나가 불현듯 내 앞에 놓이는 것이다 구름덩이 같은 흰 술 그 잔을 받아 비운 내가 떠올라 하늘 구름들 속에 섞이는 것이다...
2018.07.18 10:20

오늘은 천사들의 마지막 날/이원
햇빛이 각도를 조금씩 바꿀 때 얼굴이 하나씩 늘어났다 햇빛이 얼굴을 조금씩 열고 들어갈 때 골목 냄새가 났다 초록 직전 땅속을 상상하는 일 심장을 가볍게 옮겨 보는 일 허공은 신들의 ...
2018.07.16 10:54

오래된 처마 아래서/이명기
오래된 집 처마 아래 오랜 세월 빗물이 딛고 간 저 막사발 같은 발자국들 저 빗방울이 파 놓은 단단한 파문들 저 빗방울이 파 놓은 단단한 울림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오래된 집의 눈길인 ...
2018.07.13 09:27

참나무 아래 누워/김개미
찡그리지 마 흙이 얼마나 부드러운데……. 자고 일어나면 참나무 뿌리가 내 머리통을 휘감고 있을 거야 얼마나 편안할까? 참나무 뿌리가 뇌 속에 들어오면 당황스럽겠지만 좀 아프겠지만 참나무...
2018.07.11 0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