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오후 한 詩

벚꽃 엔딩/정창준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벚꽃잎이, 벚꽃잎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가까스로 넘기자마자, 분분한 해고의 순간, 바람을 핑계로 계약직의 생애가 저문다. 나무의 열매를 나눠 가진 ...
2018.06.22 09:19

빚의 역사/서정학
그 대출은 처음은 단순한 착오로 생겼다. 숫자를 하나 더 썼다던가 서류가 한 장 빠졌다던가 하는 그런 일이다. 일단 계좌에 입금이 되니 신용에 따라 쓸 일이 갑자기 늘어났고 일단 있으면 써...
2018.06.20 10:18

다금바리/한영수
한 마리 잡아 올리면 표정이 풀린다 두 마리 끌어올리면 인생은 네 박자~ 십팔번 노래가 절로 나온다 어망을 푼 아내가 웃고 김 씨가 따라 웃는다 이만하면 일당은 했네, 라면에 식은밥을 말다...
2018.06.18 10:46

환하다/이경철
가을 햇살 알갱이 반짝이는 피라미 떼. 물속을 꼬누는 해오라기 눈 시린 부리. 숨 멎고 흐름도 멈춘 여울목 한참. 언뜻 바람에 흩어지는 갈대꽃 홀씨들. 환하다. 아, 정말 "환하다." 그런...
2018.06.15 09:11

여우비/이병국
젖지 않았다 여섯 번째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너를 기다리며 빈손을 가만히 쓸어 본다 주름의 굴곡을 비끄러매고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온종일 내렸다는 것을 조용한...
2018.06.14 10:11

최초의 거울/장석원
사랑, 불길에 휘감기는 오래된 상처 사랑, 죽음을 배송하는 깊은 병 뼛속에서 얼어붙고 피 속에서 증발하여 기쁨을 삭제하는, 사랑 상처 깊은 사람은 언제나 상처 근처로 끌려간다네 뜨겁게 ...
2018.06.12 13:37

산골 애인에게/허연
망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당신, 그렇게 등 돌리고 가서는 어떻게 그 눈 많은 날들을 이겨 냈는지 세찬 물소리가 혼을 빼 가던 강변 민박집에서 눈을 감으면 누군가 떠나가는 소리들...
2018.06.11 11:10

가장 행복했었다/허의행
개도 똥을 눌 때는 재촉하거나 때리지 않는다 산짐승도 똥을 눌 때는 총을 겨누지 않는다 하루 중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만은 행복했었다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바람도 없었다 아늑했다 조용한 ...
2018.06.08 09:20

한 되/박철
논 열댓 마지기 물려받은 호균 아재는 술만 취하면 김포가 금포 되는 날 타령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김포가 금포 되리라 믿는 이는 없었다. 허나 세월이 흐르니 김포가 금포 되기도 하였지만...
2018.06.07 11:10

딱지본 언문춘향전/송재학
알록달록한 딱지본 옥중화이다 오십 년 전부터 할머니였던 외할머니가 금호 장터에서 사 온 1960년대 향민사 춘향전을 이모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읽어 주어야만 했다 책 읽어 주는 전기수 이...
2018.06.05 09:56

저녁의 미래/허수경
밤에 장미가 지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편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 저녁의 미래, 지구의 밤 편지에는 시계가 없었지 별 같아서 언제나 과거에서 오는 별빛이어서 과거 없이 미래만 반복되...
2018.06.04 10:40

달개비/홍신선
깡마른 육체 속에 막 짓다 만 열반인지 그 비좁은 실내에 천장까지 목숨의 환락을 새파랗게 쟁인 게 반쯤 무너진 잎 마디의 겨드랑이 틈새로 들여다뵈는 징그러운 더위도 택배 선물처럼 수납해...
2018.06.01 09:15

당신이나 그 앞에 앉은 나나 귀신 같아서 좋은 봄날의 소풍/이승희
따뜻한 후회처럼 바람이 불어서 버려진 신발처럼 눈을 뜬 당신이나 눈을 감은 나나 손 닿지 않을 발톱이나 깎는다지 너무 멀어서 좋은 당신은 버드나무 아래를 걸으며 첫 물을 받아들이는 소녀...
2018.05.31 09:06

가드너/안미옥
얼려 놓아야 할 것이 많은데 냉동실이 꽉 차 있다 방 안에서 우두커니 혼자 돌아가는 냉장고 소리를 듣고 있다 냉장고 안엔 죽은 것들만 들어 있다 검은 봉지에 담겨 오랫동안 얼어 있었던 ...
2018.05.30 15:06

멀리를 키우다/권주열
멀리를 키워 보고 싶다 옆에 둔 애완견처럼 자주 쓰다듬고 싶다 흔해 빠진 멀리, 누구나 밥 먹듯 멀리 더 멀리를 연발하지만 정작 멀리를 가까이 두는 사람은 없다 멀리는 가까이의 말을 듣지...
2018.05.29 09:28

불이문/전윤호
여기 오는데 평생 걸렸다 오르막에 지친 무릎 수고 많았다 돌아보면 모든 말들이 다 헛소리였다 비를 기다리던 저녁이 붉은 휘장 치는 시간 그리운 사람도 없으니 떠나기 적당하구나 ■'불...
2018.05.28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