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오후 한 詩

책상다리/이상호
무엇이든 다 먹어 치운다는 중국 사람들도 먹지 못하는 책상 다리가 네 개나 달린 책상 다리가 달렸으나 달리지는 못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상다리를 하고 밥을 먹던 시절 밥상이 없어 겸용하던...
2018.02.23 09:00

강화/이병국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뛰어올랐다 망토가 펄럭였다 그런데 로봇은 망토를 입지 않는다지 인류 최후의 날이 오면 곳곳에 패인 상처가 전리품처럼 남아 학교는 안 가도 된다지 ...
2018.02.22 08:42

사람의 밥/이준관
사람이 남긴 밥을 개가 먹는다 꼬리를 내리고 발톱을 오므리고 아주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밥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던 사람의 밥 어디에 저렇게 천연스런 평화가 깃들어 있었을까? 콧등에 밥...
2018.02.21 10:58

물방울 속으로/손진은
오늘 나의 놀라운 사태는 연 이파리 위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을 보는 일 제 몸에 똬릴 트는 하늘도 해도 털어 내며 굴러 내리는 맨 얼굴의 말 알아듣는 일 바람이 불거나 청개구리가 건...
2018.02.20 10:55

사흘 밤낮/이인
목련나무가 상중(喪中)인가 보다 캄캄한 밤이 목련꽃 속으로 들어간다 부고란 봄빛이 죽는 연습을 마치고 꽃무늬를 짜는 일 북극성도 조문을 와서 잠시 목련나무의 몸을 환히 비추기도 했다 ...
2018.02.19 08:41

알래스카/이주언
무료 급식소에 어린 눈사람이 들어왔다 손등이 얼어 발갛게 터져 있었다 고놈 참, 급식소 여자가 안쓰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밥을 담아 준다 너는 연어를 만났느냐, 빙하도 보았느냐, 옆...
2018.02.14 10:52

새 교수/김상혁
새를 연구하는 교수는 새를 사랑하는 학생과 새를 사랑하지 않는 학생으로 우리를 구분한다. 새를 사랑하면 새 교수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어제 그 교수가 강의 도중 조류 관찰용 ...
2018.02.13 12:45

영역/조용미
저수지 안의 섬에 검은 새들이 앉아 있다 나무들이 허옇게 변했다 나무가 말라 가는 이유는 새 때문일까 가까이 저수지 안쪽 길 따라가 보니 나무들이 쏘아보는 눈길이 있다 새가 시끄럽게 ...
2018.02.12 12:41

남의나이/이정록
환갑이 넘으면 남의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와 한 몸이 되어 황혼 길을 걷는다. 다시 맞은 봄으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팔순이 지나면 남의나이를 모신다고 한다. 기저...
2018.02.09 09:09

주말/이종민
집 앞에 시체가 있다 석양빛을 받으며 미동 없이 대문을 열면 밀려나는 위치에 있다 나는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다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졸려서 눈이 감기기 일보 직전이다 평범한 ...
2018.02.08 09:43

숲과 수첩/박은정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수첩이 하나 있다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숲 속에 흑과 백이 섞여 흐려지고 있었다 숲과 수첩에 대해 매일 메모를 해 둬 오늘은 당신에게 전화를 ...
2018.02.07 09:09

명랑한 편의점/조창규
광화문 육조 거리에 편의점이 생겼습니다 어린애들이 담배, 기생이 잡백계를 사 갑니다 양탕국처럼 캄캄한 도성에 명랑한 편의점 통금을 고하는 인경이 울립니다 감수성 과잉의 자시엔 예민한 ...
2018.02.06 09:45

천국을 옮긴 까닭/박현수
나도 죽었으면 좋겠어 일곱 살짜리 아들의 말이다 하늘나라로 가서 달래 만나고 싶어 문득 죽은 강아지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아내는 재빨리 수정한다 달래는 우리 마음속에 있어 어디, 여기...
2018.02.06 06:27

조용하고 안전한 나만의 세계/임승유
겨울밤에 너는 좋은 말을 들었다. 그래서 풍경이 좋아 보였다. 너는 좋아 보이는 풍경의 입구까지 걸어갔다. 하얗고 넓으며 소리가 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려면 수위를 지나쳐야 했다. 여기...
2018.02.02 09:54

등대슈퍼/이언주
달리던 7번 국도가 길을 멈춘다 하늘이 물빛으로 가라앉은 죽산 앞바다 등대보다 집들이 먼저 불을 켠다 몇 백 광년쯤 떨어진 눈이 반짝인다 지구 반대쪽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지만 당신은 ...
2018.02.01 11:16

끝/김병호
땅에 스몄던 그림자가 증발하다 맞닥뜨린 과포화의 경계, 거기서 꽃핀 먹장구름은 절망의 살얼음을 딛고 선 떨리는 발끝이다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가진 뽕나무 지나자 시선마저 증발하는 도...
2018.01.31 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