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오후 한 詩

업/신미균
바위가 쑥부쟁이 하나를 꽉, 물고 있다 물린 쑥부쟁이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구부정하다 바람이 애처로워 바위를 밀쳐 보지만 꿈쩍도 안 한다 바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쑥부쟁이...
2018.04.26 09:12

아쿠아리움/김이듬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나는 생각한다 실연한 사람에게 권할 책으로 뭐가 있을까 그가 푸른 바다거북이 곁에서 읽을 책을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웃고 오늘처럼 돈이 ...
2018.04.25 09:57

울고 싶을 때마다/김성규
응, 우린 잘 있으니까 걱정 말구 왜 전화하셨어요? 응, 너 바쁘니까 다음에 할 테니까 우린 잘 있으니까 전화할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눈을 감고 누워 생각해 보네 늙어 ...
2018.04.24 15:03

내가 보는 앞에서/이순현
여자는 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 남자는 반바지를 입었다 지나가는 내가 보이는 걸까 이마에서 떨어져 나온 제3의 눈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셔틀콕 때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린다 ...
2018.04.23 10:02

겨울 엽서/문태준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 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 그러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덕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
2018.04.20 09:26

옆으로 가는 사람들/홍미자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수십 미터 암흑 속 바퀴가 길을 내고 있다 단단한 바닥을 부딪는 신음 소리 찢겨 나가는 바람의 외침 못 들은 척, 마주 앉은 얼굴들 마주 보고 안기 지하철 좌석의...
2018.04.19 10:16

죽음의 방/이여원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말이 묘합니다 같은 이치로 사람의 말 개의 말 그리고 죽음의 말이 있습니다 모든 죽음은 진행 중이므로 개인마다 각자 연재 중인 죽음의 말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2018.04.18 09:54

눈을 위한 두 편의 밸런스 1/이기철
눈을 깨끗한 서정시라 한 사람이 있다. 눈을 아름다운 음악이라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깨끗한 서정시를 읽으며 작년과는 다른 눈을 만나러 간다. 눈은 왜 숲에서만 흰옷을 갈아입는 걸까? 아름...
2018.04.17 09:09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윤민석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울자. 오늘은 울자. 오늘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해도 울자. 무작정 울자. 그냥 울...
2018.04.16 10:32

다랭이논/조성식
어머니는 이마에 다랭이논 대여섯 마지기나 버시고 계셨다 나는 그 다랭이논에서 보리며 벼를 먹고 컸다 그곳도 처음엔 보리와 벼가 자랄 수 없는 버려진 잡초들로 가득했으리 삶에 파이고 세...
2018.04.13 09:10

키위, 혹은/정창준
지금 둘이 살기도 빠듯하고 힘든데 애를 낳으면 어떻게 해요? 애는 누가 키우구요? 우리가 뻐꾸기처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것도 아닌데, 친정엄마도 아프고 시어머니도 질색이신데, 지...
2018.04.12 10:11

말씨/박영희
아주마이는 어째 그리 입이 곱소 나그네도 인차 한국에 나가 보오 한국 나그네들은 고운 입매를 좋아하오 기래 나도 한국을 따라 하다 보니 인차 입이 고와지더란 말이우다 기란데 와 또 쎄졌소...
2018.04.11 10:01

층계참/김건영
층계참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층계참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슬픔을 곱씹는다 비밀의 끈을 풀어내거나 분노한다 층의 국경은 너무 가까워서 전서구를 날릴 수 없다 층계참에 사는 ...
2018.04.10 13:21

플라즈마/정우신
고물상 의자에 앉아 폐전구를 씹는 소년, 눈길이 닿는 곳마다 어둠이 밀려난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고철 사이에서 눈을 뜨고 있는 희망을 이해할 수 없다 손가락이 모자...
2018.04.09 09:52

우편함엔 편지가 없다/김기화
'알이 부화하고 있어요, 우편물이나 이물질을 넣지 마세요! 주인백' 언제부턴가 편지가 부재하는 그들의 방 새집 모양의 빨간 우편함엔 새 식구들이 허락도 없이 세를 들었다 뾰족한 주둥이들...
2018.04.06 10:20

아름답다는 거/오봉옥
어딘들 아름답지 않으랴만 바다에 종아리를 가만히 적시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참 이쁘더라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알카트라즈 감옥조차 떠오르는 해를 와락 끌어안고 있으니 눈물 나게 이쁘...
2018.04.05 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