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오후 한 詩
  • 심해어/진수미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고 눈을 반쯤 감은 현실이 있고 스크린이 있고 액자처럼 세계를 껴안은 어둠이 있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이름도 사라지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

    2018.09.03 10:22
  • 느리게 걷는 밤산보길/박형준

    나는 천변에서 밤산보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흩어졌던 오리들이 물가에 서로 모여 깃털을 붙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앞에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는 중년 사내가 전기 대신 손으로 바퀴 ...

    2018.08.31 08:32
  • 일요일이에요/정우영

    일요일이에요. 일요일은 한정 없이 느려지는 날. 점심은 어떻게 내올까요. 냄새나는 타성을 삶을까요. 차가운 무관심을 비빌까요. 공기에 떠도는 암모니아는 지겹고요. 수북이 부어 주는 ...

    2018.08.29 09:47
  • 전당포에 가면/김태우

    어둠이 지면에 닿을 무렵부터 전당포 입구에는 길게 줄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내내 허리춤에 찬 그림자를 벗었다가 입었다가를 반복했다. 전당포 입구의 줄도 줄었다가 ...

    2018.08.27 09:08
  • 침묵/이창수

    아버지 참나무 베어다 어머니 목욕물 데운다 더운물에 찬물 붓는 소리 더운물에 손 담그는 소리 다시 한 바가지 찬물 붓는 소리 손으로 물 휘젓는 소리 치매 앓는 어머니 안아다 아버지 ...

    2018.08.24 08:55
  • 단체들/정영효

    자리가 많기 때문에 모이고 자리가 남기 때문에 모인다 자리가 없으면 자리를 찾기 위해 모인다 혼자가 싫어서 혼자 했던 생각을 나누기 위해 모이고 떨어져 지내다가 모이는 게 어떤 ...

    2018.08.22 09:25
  •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권정일

    인형을 망가뜨리며 소녀는 자라고 인형을 버리면서 소녀는 완성되지 아주 어린 인형의 눈망울 같은 나날들 살아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형들 말해 봐 말해 봐 립스틱을 바르며 말해 ...

    2018.08.20 08:58
  • 발바닥으로 읽다/조경희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 낸다 고무통 수북이 거품이 솟는다 맥을 ...

    2018.08.17 09:17
  • 소녀와 노랑나비/한영수

    아리랑 장독대 봉숭아 넙데기 할머니가 기억하는 모국어 열다섯이었다 비행장에서 일했다 헌병이 큰 칼 차고 끌어가기 전까진 착, 착, 착, 군화 소리 지금도 들려, 해방은 더 이상 ...

    2018.08.13 09:50
  • 초보 운전/박현수

    아무리 꽉 막힌 도로라도 길은 질식하지 않는다 녹조가 끼지 않는다 죽은 붕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숨 쉴 곳이 길마다 있기 마련이니까 들락거리며 바람을 펌프질하는 사이가 있기 ...

    2018.08.10 08:49
  • 블루클럽/이성렬

    늦은 가을 저녁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나의 텅 빈 시선 끝에, 그곳은 심해에 내려진 어항처럼 홀연히 떠올랐다. 방파제 바깥을 응시하는 밍크고래의 매끄러운 뱃살을 닮은 푸른 간판에 ...

    2018.08.08 09:05
  • 소리/서동균

    미끄럼틀 타는 소리 술래잡기하다 넘어진 소리 비석치기하는 소리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는 소리 아이스께끼하고 도망가는 소리 고무줄 끊고 놀리는 소리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팽이에 ...

    2018.08.06 10:34
  • 괭이밥/김성철

    볕 그늘에 앉아 하루 종일 들풀들의 이름이나 지어 줬으면. 당신이 붙인 이름과 내 지은 이름의 차이를 가지고 또 다른 이름 하나 지었으면. 그리하여 고운 이름 하나 얻어 당신 닮 ...

    2018.08.03 09:17
  • 넙치/김경후

    어둑한 보도블록, 울툭불툭, 넙치 하나, 누워 있다, 그것은 진흙색 바닥보다 넓적하게, 깊게, 바닥의 바닥이 되고 있는 중, 가끔, 이게 아냐, 울컥, 술 냄새 게운다, 뒤척인다, 하지만 ...

    2018.08.01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