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지도자의 조건은 '경청'
달콤한 포퓰리즘 거부해야
선택은 결국 유권자의 몫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T.S. 엘리엇 시의 첫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새로움과 희망이 피어오르는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계엄과 탄핵의 불구덩이 속에서 헤쳐나온 상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안고 한 달 남짓 후의 대선이 새로운 나날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의 줄을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나와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희망이 되살아날 수 있을까? 답은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한다'는 데 있다. 어떤 후보를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몫이고 책임이다.
지도자의 덕목으로 꼽히는 것은 비전, 도덕성, 정직함, 소통, 용기 등 매우 많다. 배우자의 자질도 거론된다. 문제는 이런 모든 덕목을 다 갖춘 후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좋은 지도자는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도 아니라, 옳은 방향으로 가게끔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국민들이 반드시 들여 대어야 할 잣대를 두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경청이고 다른 하나는 포퓰리즘에 대한 거부이다.
우선 경청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 대통령들의 가장 부족했던 점, 실패를 초래한 이유에 대해 되짚어 보면 자명해진다. 모두 나름대로 비전과 소신이 넘쳤고 결단력도 있었다. 그 소신과 결단력이 자해 수준으로 파괴력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니라 경청의 부재였음이 명백하다.
윤 전 대통령은 본인의 뜻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불같이 화를 냈었다고 하니 직을 걸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직언할 수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듣기는 들으나 실제로는 듣지 않았던 분이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면 레이저 눈빛을 쏘았던 것으로 유명해졌다.
경청하지 않는 대통령이 왜 문제인가? 한국 사회는 수많은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자기중심적인 리더십은 문제의 정확한 이해를 저해하고 독선을 가져온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소위 소신에서 나온 정책을 고집하면 정책은 실패하고 사회는 분열된다. 의대 정원 증원 문제가 바로 그런 패착이 아니던가? 진짜 리더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의 말도 정중하게 듣고 성찰하는 포용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설득당할 수도 있어야 민주주의"라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말하는 법보다 듣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이다.
경청하는 리더를 최우선 자질로 꼽는다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자질이 포퓰리즘을 거부하는 용기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민주주의의 그림자"라고 한다. 달콤해 보이는 사탕과 같은 것들이 종국에는 독약이 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 아니겠는가?
기본소득, 4.5일제 근무, 기회소득, 무상버스 등 후보들의 포퓰리즘상 복지공약들이 뉴스를 탈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성장 없는 분배는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 뿐이다. 다시 가난해진 나라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게 할 것인가? 저 멀리 남미의 아름다운 나라 아르헨티나를 아는가? 20세기 초까지 세계 10위의 부자나라로 캐나다와 호주를 앞서면서 세계의 부러움을 샀지만 급진적인 복지정책으로 두 차례 국가파산을 겪고 남미의 빈곤국 중 하나가 된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을까 두렵다.
포퓰리스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그 대가로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들이다. 달콤한 독배를 마시고 포퓰리스트 지도자를 뽑는 순간 우리 모두가 나락으로 서서히 떨어지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곧 잔인한 4월은 지나갈 것이다. 그 잔인함 속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는 생의 의지가 숨어 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지도자를 잘 뽑아서 다시 한번 날아보자.
박은하 전 주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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