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제일 안 팔리는 시기가 가을입니다." 요즘 잘 나가는 한 출판사 경영자에게 들은 이야기다. 곡식이 무르익어 말까지 살찐다는 풍요의 계절 가을, 출판업계는 보릿고개를 넘는다고 한다. 내 상식과 다른 이야기라 듣고 놀랐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예를 들어 작년 책 판매량을 보자.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달은 봄 새 학기 초입인 3월(판매액 1741억원)이다. 다음은 겨울 방학인 12월(1535억원)과 1월(1535억원)이다. 여름 방학과 휴가가 있는 7월(1508억원)이 그 뒤를 이었다. 가을인 9월, 10월, 11월 판매액 평균은 1368억원으로 4계절 중 가장 적다. 가을은 사실 책을 가장 안 읽은 계절이다. 작년에도 그랬다.
출판업계에선 계절적 비수기에 책을 좀 읽으라고 만든 마케팅 문구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가을에 책을 많이 읽을 거라고 생각한 분들은 마케팅에 휩쓸려 제대로 판단을 못 한 것이다. 사실 가을에 책이 안 팔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출판사들이 가을에 눈길을 끌 신작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 겨울방학과 개학 시즌에 야심차게 준비한 책을 출판한다. 책이 안 팔리니 책을 안 놓는다. 새 책이 없으니 책이 안 팔리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시기가 일제시대란 말이 있다. 역사 강사 설민석씨는 2019년 tvN의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에 출연해 "1925년 일본이 도서관을 지어놓고 우리 국민들에게 일본 책 읽기를 강요했고, 그때 사용한 표어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다. 일본어로 써놓은 책을 읽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고대에도 가을은 계절이었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여름도 끝나 날씨가 선선하니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어도 덥지 않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시인 한유가 아들에게 준 글의 한 구절이다. 말하자면 당나라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표어다. 아들이 책을 가까이하면 굳이 책을 읽으라고 할 필요가 없다. 가을 행락철 밖으로 나도는 아들에게 책이나 좀 읽으라고 품위 있게 한마디 한 듯하다. 아마 당나라 시절부터 가을엔 책이 안 팔렸을 것이다.
서양에서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미국은 1919년부터 11월 한 주를 ‘Children’s book week’로 정해 책 읽기 행사를 연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스코틀랜드 등 세계 곳곳에서 같은 행사를 한다. 일본은 1947년부터 매년 공휴일인 문화의 날(11월3일)을 중심으로 10월27일부터 11월9일까지 2주를 ‘독서주간’으로 정하고 책을 읽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9월은 독서문화진흥법상 독서의 달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독서의 달을 맞아 한 달간 전국의 도서관, 17개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을 중심으로 지역별 특색을 살려 독서문화 행사 1만여건을 개최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내 생각과 진실이 다르면 당황하고 심할 땐 분노한다. 하지만 가을이 책 안 읽는 계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화가 나기보다는 부끄러웠다. 아무도 가을에 책이 많이 팔린다 말하지 않았다. 지레짐작해 스스로 오판한 것이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의도한 것이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연중 쉼 없이 책을 계속 읽었다면 가을엔 책 읽을 생각이 덜 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올가을엔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
백강녕 디지털콘텐츠매니징에디터 young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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