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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한국의 시멘트산업사

최종수정 2020.09.01 15:37 기사입력 2020.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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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시멘트산업의 태동, 그리고 전후 국토재건

[기획]한국의 시멘트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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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한국은 연간 6000여만 톤의 생산 규모를 갖춘 세계 12위의 시멘트 대국이다. 시멘트 기술 면에서도 1980년대부터 해외에 생산 기술을 수출할 만큼 시멘트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한국 시멘트산업의 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지난 60~70년대 경제발전기 국가기간산업의 역할을 다했지만, 2000년대 들어 환경을 망치는 공해 산업으로 낙인 찍히면서 국민 관심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시멘트산업은 친환경산업으로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본지는 미운오리에서 백조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 시멘트산업의 역사를 10회에 걸쳐 재조명해 본다.[편집자주]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시멘트는 1824년 영국의 조셉 애스프딘(Joseph Aspdin)이 '포틀랜드 시멘트'를 발명, 특허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1825년 영국에서 시멘트 공장이 처음 세워진 이후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으로 확산되면서 건축문화의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의 시멘트산업은 1919년 일본인에 의해 평안남도 승호리에 첫 시멘트 공장이 세워진 이래 100여년의 연륜이 쌓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후의 사회적 혼란과 1950년 6·25 내전 등의 국란을 겪으면서 정치·경제 등 모든 사회상이 원점으로 후퇴해버린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우리 시멘트산업의 역사는 60여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격변기와 기적적 경제발전 등 국내 시멘트산업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연간 6000여만 톤의 생산규모를 갖춰 세계 12위의 시멘트 대국으로 부상했고, 시멘트 기술 면에서도 1980년대부터 해외에 생산 기술을 수출할 만큼 유럽·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멘트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시멘트산업의 발전은 국가의 여건과 경제성장의 특수성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19세기말 산업화에 앞선 일본은 청·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침략의 마수를 뻗쳐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다. 이후 36년 간 우리의 정치·외교·경제·문화·산업 등 모든 것은 일본에 의해 좌우되는 암흑기를 겪게 되는데, 우리나라 시멘트산업은 이런 오욕의 역사 속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다.

일본 오노다시멘트 삼척공장. [사진=한국시멘트협회]

일본 오노다시멘트 삼척공장. [사진=한국시멘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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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12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최대 시멘트 회사인 오노다시멘트는 만주와 중국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평안남도 평양 교외에 위치한 승호리 경의선 철도 주변에 우리나라 최초로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당시 북한 지역은 총 5개 공장에서 131만 톤의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남한 지역은 조선 오노다시멘트(주)가 삼척에 공장 건설을 추진해 1942년 7월 삼척시멘트공장을 준공하지만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준공 첫해인 1942년에는 8만 5850톤, 1944년에 1만 6845톤, 광복을 맞은 1945년에는 9063톤으로 생산량이 감소해 북한 지역의 시멘트가 남한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당시 시멘트 내수는 2차대전이 끝나기 이전 해인 1944년에 76만여 톤을 넘어섰고, 1인당 소비도 31㎏으로 늘었다.


1945년 광복의 기쁨과 희망도 잠시뿐, 곧 이어 휘몰아친 정치적·사상적 대립과 혼란으로 우리 민족에게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상잔의 비극이 발생한다. 3년여 만에 휴전으로 일단락되지만 그 상처는 매우 컸다. 주택의 손실과 파괴는 59만 5260호에 달했고, 그나마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 시설마저 잿더미로 변한 남한 땅은 그야말로 초토화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딘 서울의 모습. [사진=한국시멘트협회]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딘 서울의 모습. [사진=한국시멘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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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중요 산업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편재 돼 있었고, 시멘트 시설도 남북한 총 6개 공장(생산 능력 170만 톤) 가운데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자금 63만 1500달러 지원으로 보수 후 재개된 삼척공장(8만 4000톤)만이 남한에 남은 유일한 것이며, 당시 이용 가능한 총 전력은 3%에 불과했다.


삼척공장이 본격적인 시설확장을 통해 국내의 시멘트 조달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 것은 1956년 동양시멘트(주)로 전환된 이후부터였다. 이후 정부는 재건에 필요한 시멘트 수요 급증에 대비해 1954년 경북 문경에 새로운 시멘트 공장(연산 24만톤)인 대한양회(大韓洋灰) 공업주식회사를 건설하게 된다.


한국시멘트협회 관계자는 "우리 시멘트산업의 시작은 사실상 6.25 한국전쟁 이후부터라고 보는 것이 맞다"면서 "그야말로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난 기적과 같은 역사였다"고 말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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