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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사람]영국의 적기조례와 한국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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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회도 그랬지만 20대 국회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이전 국회도 그랬지만 20대 국회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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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종화 기자]정부의 과잉규제에 대해 반발하거나, 시대를 퇴행하는 불필요한 악법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례가 영국의 '적기조례(赤旗條例, Red Flag Act)'입니다.


적기조례는 단어가 가진 의미처럼 '붉은 깃발법'이라고도 합니다. 정식 명칭은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 줄여서 'Locomotive Act'라고도 하는데 3번에 걸쳐 개정됐고, 적기조례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865년의 2차 개정 때부터입니다.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퇴행시킨 악법으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적기조례가 도입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1826년 영국 런던 시내에 증기기관을 탑재한 28인승 자동차가 등장합니다. 런던과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 버스로 모두 10대가 투입돼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다른 증기기관 자동차들의 보급도 점점 늘어났고, '증기자동차의 황금시대'가 열리게 되지요.


그러자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증기자동차의 폭발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무지막지하게 덩치가 큰 증기자동차가 길을 막는 것은 예사였으며, 시끄럽고 무거워 도로를 자주 망가뜨리면서 사회적 이슈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양길을 걷던 마차 업자들이 반기를 들고 정치권에 로비를 해 적기조례를 통과시킵니다.

1861년 영국 의회는 관련법을 시행합니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생긴 문제점을 고치려 만든 도로교통법이 탄생한 것이지요. 적기조례에 따라 증기자동차의 중량은 12톤으로 제한되고, 최고 속도는 시속 10마일(16㎞/h), 시가지에서는 시속 5마일(8㎞/h)로 다니도록 제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부들이 실직하면 안되니까, 자동차는 마차보다 늦게 운행하라'는 것입니다.


1865년에는 법을 개정해 제한규정을 더 강화시킵니다. 증기자동차는 시외에서 시속 4마일(6.4㎞/h), 시내에서는 시속 2마일(3.2㎞/h) 이내의 속도로 다니도록 했습니다. 1대의 자동차에는 운전수와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타야하고, 그 중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의 55m 앞을 달리면서 마차에게 자동차의 접근을 알려야 했습니다. 이 때부터 적기조례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1896년 적기조례가 폐지되자 런던 시내를 달리면서 이를 축하하는 자동차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1896년 적기조례가 폐지되자 런던 시내를 달리면서 이를 축하하는 자동차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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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여론이 나빠지자 1878년 3차 개정 때 기수는 없어졌지만, 전방 보행요원은 자동차의 18m(20야드) 앞에서 마차에게 자동차의 접근을 알려야 했습니다. 또 말과 마주친 자동차는 여전히 정지해야 했고, 말을 놀라게 하는 증기를 내뿜지 말라는 조항도 추가됐습니다.


이 법은 30여년이나 시행됐고, 1896년에야 폐지됩니다. 적기조례 시행 직전 영국의 자동차는 시속 40㎞의 속도를 낼 수 있었지만,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던 영국은 30여 년 만에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와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이 때 벌어진 기술 격차를 채우는데 무려 70여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지금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한 '브렉시트(Brexit)'도 먼훗날 영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요? 한 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의회도 가끔 이런 헛발질을 했습니다. 한국의 의회, 즉 국회는 어떨까요? 과거의 잘못은 차치하고, 현재만 따져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입니다.


지금 20대 국회가 쏟아낸 법안 중에는 '적기조례'를 능가하는 법안들이 적지 않습니다. 법안 발의 실적은 역대 최고입니다. 그만큼 국회의원들이 입법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의원들이 쏟아낸 법안들은 대부분이 '법 같지 않은 법'이었습니다.


법안을 심사하는 의원들조차 '입법공해'라며 혀를 내두르고 있습니다. 언론과 시민단체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공천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남발하는 법안 발의 때문에 정작 중요한 법안들은 부실하게 처리되거나, 심사 대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탐사저널리즘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대표적인 법안이 H의원이 발의한 '유리천장위원회' 법입니다. 회사나 기관 등 조직 내에서 여성들의 승진을 가로막는 이른바 '유리 천장'을 없애기 위해 조직 안에 '유리천장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입니다.


문제는 이 법안을 모든 공공기관 관련 법마다 개별적으로 개정안을 냈다는 점입니다. 예를들어 태권도진흥재단에 유리천장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태권도 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법안을 발의하면 결국 입법공해가 됩니다.


유리천장위원회 법의 경우 200여 건이 거의 모든 상임위원회에 회부됐고, 소관 상임위 입법조사관들은 이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실효성 없는 법을 제안하고, 이를 검토하느라 그만큼의 인력과 시간, 예산이 낭비된 것입니다.

국회에서 펼쳐진 다양한 장면들을 보고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안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일까요, 국회의원들의 표정도 다양합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국회에서 펼쳐진 다양한 장면들을 보고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안의 심각성을 알기 때문일까요, 국회의원들의 표정도 다양합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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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을 넘겨받은 해당 상임위는 "모든 공공기관에 대해 '개별적으로' 발의할 것이 아니라 '양성평등기본법'이나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등에서 발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검토보고서를 올립니다.


지난해 9월 국회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 회의의 한 장면입니다. S전문위원이 "건설산업 경영자와 종사자 등을 의미하는 '건설업자'라는 용어를 '건설사업자'로 변경하는 내용"이라고 상정된 법안에 대해 설명합니다. 전문의원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한 의원이 되묻습니다. "'업자'를 '사업자'로 바꾸자?" 어이가 없어 내용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이어 다른 의원은 "절말로 입법공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업자하고 사업자하고 뭐가 다른가? 이러다가 국회의원도 이름 바꾸자고 하겠다, 입법의원으로"라고 성토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법 정말 수치스러워요. 할 말 없어요, 할 말 없어"라고 덧붙입니다.


소위원회에 상정된 '에너지이용 합리화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전문위원의 보고를 받은 의원들이 스스로 수치스럽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본인들이 발의한 법안은 아니지만 같은 국회의원으로서 수치스럽다는 말이겠지요.


선거를 앞두고 각 당에서 새로운 인물을 대거 영입하고 있습니다. 매번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일입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거의 결과 이렇게 무섭습니다. 왜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일까요?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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