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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시각] 집 없는 것도 서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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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뻗을 잠자리 없는 설움이 최고
전세대출금리 치솟아 무너지는 징검다리
상환기간 20년으로 늘리고 세제혜택 줘야

[초동시각] 집 없는 것도 서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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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설움이 제일이라지만 날 저물어도 다리 뻗고 잘 잠자리가 없는 설움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먹을 것은 몇 푼만 있어도 해결할 수 있는 먹을거리가 많은 세상이고, 구걸하거나 아닌 말로 훔쳐 먹을 수도 있다. 잠자리는 얼굴을 안다고, 방이 많다고 내주지 않는다."


작가 고(故) 박완서 선생은 그의 책 '친절한 복희씨'에서 1980년대 여공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전셋집 하나를 얻기까지 겪는 어려움을 이 한 구절로 말한다. 소설의 시점으로부터 40년 가까이 흘렀건만 집 없는 사람들의 서러움은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더해졌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월세로 시작해 아껴가며 목돈을 모아 전세를 구하고, 자본금을 차차 늘려가 내 집을 마련하는 게 '한국 주거의 문법'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전세 살던 사람이 거꾸로 월세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해졌다.100년 넘게 서민들이 집을 사기 전 '중간 단계' 역할을 해온 전세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된 셈이다.

징검다리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시중은행의 전세대출 이자 수준을 보면 답이 나온다. 전세대출금리가 주택담보대출 금리보다 높거나 맞먹는 수위까지 치솟았다.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11일 기준)의 전세대출금리 상단은 연 5.77%. 이달 첫째주에는 상단이 6%를 넘은 적도 있다. 전세대출은 서울보증보험 같은 기관에서 보증을 받기 때문에 주담대보다 금리가 낮은 게 일반적인데, 비정상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수요자 대출'이란 게 죄라면 죄다.


은행 입장에서 전세 세입자들은 '잡아 놓은 물고기'다. 주택 경기가 나빠지면서 주담대 수요가 줄자 은행들은 마진인 가산금리를 일부러 낮춰서 대출 유인책을 펼쳤다. 하지만 전세는 다르다. 집값이 오른 만큼 전세가도 수억원 이상 불어난 집이 속출했지만 당장 살 집이 필요한 전세 세입자들은 돈을 더 빌려야 한다. 가만있어도 찾아올 사람들에게 은행이 굳이 금리를 조정해 줄 필요가 없단 이야기다. 이자가 6%에 달하자 전세 임차인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보증금 1억 = 월세 40만원'인 전월세 전환율은 저금리 시절에나 "전세가 돈 버는 길"이란 말의 근거가 됐지, 고금리 시기엔 "차라리 월세가 낫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


세입자들이 아우성치자 금융위원회는 '주택금융공사가 보증하는 저금리 전세대출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전세가가 '억 소리 나게' 오른 서울에선 있으나마나 한 대책이다. 주금공 대출 한도(현재 2억2200만원)를 10월부터 4억4000만원까지 올리는 게 정부 안인데, 전세가격 7억원 이하만 대상이다. 애초부터 전세가격이 높은 서울 아파트들은 대부분 해당되지 않는다.

연말까지 금리 상승은 불가항력적이라 전세 세입자를 위한 파격적인 정책이 긴요하다. 이달 나온 50년 만기 보금자리론처럼, 전세대출 원리금 분할 상환 기간을 20년으로 늘려주는 게 방법이다. 전세자금대출을 받는 차주 중 절반 가량이 앞으로 장래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20~30대다. 이를 감안하면 기간을 연장해도 은행에게 큰 리스크가 아닐 뿐더러 차주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요즘엔 전세대출 이자에 대해 소득공제를 받는 것보다 월세 지출액을 세액 공제받는 것이 유리한 경우가 늘고 있다. 전세대출 세제 혜택을 추가로 내놓는 것 역시 필요하다.


부동산 시장에선 최근 들어 정비사업 예정 단지로 이삿짐을 옮기는 젊은 임차인들이 심심찮게 보인다고 한다. 재건축이 임박한 단지의 전세 가격이 그나마 다른 단지보다 낮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이주하는 것이다. 고금리 상황에서 전세 세입자들의 선택지는 생돈이 나가는 월세로 옮겨타거나 주거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이전하는 것 뿐이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처럼, 마땅한 잠자리가 없는 걸 걱정을 하는 건 끼니가 없는 걸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못할 노릇이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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