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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의 객석에서] 악보라는 텍스트를 지휘로 재창조한 마법사

최종수정 2021.02.17 14:07 기사입력 2021.02.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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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



오늘부터 아시아경제 ‘인문학카페’의 새 필진에 합류한 필자는 월간 ‘객석’ 기자·편집장, 중앙일보 음악 담당 객원기자,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전문위원을 역임했다. KBS TV ‘클래식 오디세이’ 음악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KBS 클래식 FM의 ‘출발 FM과 함께’ 등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세종예술아카데미 등 각종 공연·강좌에서 해설을 담당하고 서울문화재단, 예술경영지원센터, 창작산실, 서울국제생활예술오케스트라축제,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서울청년예술단 멘토도 역임했다. 2020년 해설자로 참여한 현대차 정몽구 재단 주최의 ‘온드림교과서음악회’는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현재 벅스뮤직에 ‘클래식을 만나다’ 코너를, 격월로 서울문화재단 월간지 ‘문화+서울’에 ‘류태형의 음악정원’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명진출판)’와 공저 ‘클래식튠(모노폴리)’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그 책)’이 있다.


지난달 25일은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의 탄생 13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기념으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에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레코딩들을 엄선해 플레이리스트를 올렸다. 129개 파일로 21시간58분에 이르는 분량이다.

푸르트벵글러는 명실공히 20세기 최고의 교향악·오페라 지휘자로 꼽힌다. 누군가 최고의 지휘자를 묻는다면 필자의 대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필자가 푸르트벵글러를 처음 듣게 된 건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당시 ‘객석’ ‘음악동아’ ‘레코드음악’ ‘월간음악’ 등 이런저런 음악 잡지를 읽었다. 푸르트벵글러는 평론가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지휘자였다. 필자는 고교 시절 그가 지휘한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LP로 접했다. 뜨거운 해석이었지만 음질이 좋지 않아서인지 요란하고 정돈되지 않은 연주로 여겼다.


그를 재발견하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이었다. 독일에서 발매된 8장짜리 푸르트벵글러 CD를 중고로 구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1947년 베토벤 ‘운명’ 교향곡과 슈베르트 교향곡 9번, 슈만 교향곡 4번, 브람스 교향곡 1번 등 그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특히 1952년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연주한 브람스 교향곡 1번은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듣고 난 뒤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음악, 걸을 때 내게서 ‘흘러내리는’ 음악을 느끼곤 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난 지 67년이 다 되어간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푸르트벵글러의 이름이 빛을 잃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들려준 음악 그 자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선입견 없이 열악한 음질의 방해를 넘어 펼쳐지는 유장한 드라마는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돼 잊히지 않는다.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시카고 심포니 행정 수석, 미국 오케스트라 연맹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음악평론가 헨리 포겔은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휘자만 고르라면 푸르트벵글러를 고르겠다고 말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음악적 구조와 건축물을 꿰뚫는 명료한 이념으로 즉흥 연주와 환상적 성격을 결합시켰다고 말했다. "단지 악보에 충실한 것을 넘어선다. 연주회장의 분위기가 녹아들거나 불꽃을 튀며 갈등하는 양상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사흘간 매일 밤 같은 곡을 연주해도 모두 다른 연주가 나온다." 포겔의 평가다. 그래서 애호가들은 그의 음반을 날짜별로 모으고 듣는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네빌 카더스는 푸르트벵글러가 다른 지휘자와 구별되는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음악의 휴지부에서조차 음악적 잔영이 지속된다." 듣는 이를 침묵 속에 빠뜨렸다 거기서 꺼냈다 하면서 긴장을 지속시켰다는 얘기다.


푸르트벵글러는 관현악 사운드의 아래를 다지고 그 위를 쌓아가는 식으로 축조한다.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저현을 단단한 화성적 토대로 삼아 다양한 비브라토로 풍부한 현악군 소리를 덧댄다.


지휘 모습은 그리 멋지지 않았다. 영상으로 보면 클라이맥스에서 마치 발작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지휘봉을 떨어댄다. 정확한 비팅이나 멋진 지휘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서 깊고 심오하고 뜨겁고 열정적인 음악이 만들어져 나온다.


이완과 긴장 반복으로 생생한 연주 이끌어
뉴욕 필 초청 40세가 되기 전 세계적 명성
베를린 필 지휘로 명실공히 음악계 황제로
탄생 135주년…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거장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기본적으로 박자를 센다기보다 멜로디의 선을 그려나가는 식이었다. 생명을 어루만지는 듯한 그의 지휘는 살아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다시 이완과 긴장을 반복해 심장이 뛰는 음악, 자연의 움직임 같은 생생한 연주를 끌어냈다. 연주가 너무 규칙적이고 매끄러우면 기계적으로 느껴진다.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은 곳곳의 작은 돌에 부딪쳐서 우회한다.


푸르트벵글러는 1886년 독일 베를린에서 뮌헨 대학 교수였던 고고학자 아돌프 푸르트벵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통 게르만 혈통을 물려받은 빌헬름의 풍부한 교양은 어린 시절의 가정교사들 덕이었다. 학자나 예술가를 가정교사로 초빙하는 것은 당시 유복한 독일 집안의 전통이었다. 아버지는 고고학 여행 때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빌헬름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 유적의 위대함을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고 학습했다.


학교라는 획일적 울타리에 갇힌 적이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은 다양한 철학과 예술을 아우르며 너른 지평을 향해 날아오르기 위한 충실한 준비 기간이었다.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처음에 작곡을 공부했던 푸르트벵글러는 1905년부터 브레슬라우와 뮌헨 등지에서 견습 지휘자 경험도 쌓았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대 위에 공식 데뷔한 것은 스무 살 때인 1906년 6월이다. 당시 뮌헨 카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과 자작곡 교향곡 1번 중 아다지오, 메인 프로그램은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었다.


1911년 뤼벡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된 푸르트벵글러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1915년 만하임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인정받고 1920년 베를린 국립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됐다. 승승장구 끝에 푸르트벵글러는 36세이던 1922년 아르트루 니키쉬(1855~1922)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다.


푸르트벵글러의 명성은 40대가 되기도 전에 세계에 알려졌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뉴욕 필에 초청돼 미국에서 활동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빈 필 겸 빈 국립오페라 상임 지휘자로 활약했다. 거기에다 바이로이트 음악제 총감독까지 석권한 푸르트벵글러는 명실공히 음악계의 ‘황제’였다.


푸르트벵글러는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의 나치 독일에서 나치의 부당한 예술 간섭에 맞서고 유대계 음악가들의 도피를 도왔다. 유대인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1895~1963)가 나치 독일에서 추방당했을 때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반대하며 힌데미트를 옹호했다. 그러나 나치 치하에서 지휘를 계속한 것 자체가 히틀러에게 부역한 일로 간주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 협조한 혐의로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1947년 무죄 판결에 따라 복권돼 다시 베를린 필의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1952년 바이로이트 연주회를 지휘하고 같은 해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가 됐지만, 1954년 사망과 함께 음악계 제왕의 대권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에게 넘어갔다.


푸르트벵글러는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푸르트벵글러는 명예욕과 질투심이 강하고 고상하게 보이기를 좋아했다. 비겁자이면서도 영웅적이었고, 강하면서도 약했고,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박식했다. 독일적이면서 세계적이었고, 음악에서만은 조화가 잘 잡혀 있고 대범했다." 베를린 필 첼로 수석이었던 그레고르 퍄티고르스키(1903~1976·정명화의 스승)의 술회 내용 가운데 일부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승승장구하는 젊은 카라얀을 질투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라얀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푸르트벵글러는 멋쟁이였지만 나사가 한두 개 풀린 사람처럼 셔츠 단추를 잘못 끼우고 리허설에 임하는 일이 많아 단원들에게 웃음거리가 됐다고 한다.


소프라노 마리아 슈타더(1911~1999)는 푸르트벵글러를 "세상사에 어두운 얼간이"라고 불렀다. 근본적으로 정치적이지 못한, 정치적 술수가 얕은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그가 악마나 독사 같은 나치와 교류했으니 이용당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는 푸르트벵글러를 ‘아마추어’라고 말했다. 얕잡아본 표현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프로로서 지휘와 소통의 기술, 다시 말해 연습의 분배라든지 악단원들의 배려를 통한 전략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대학 오케스트라가 연간 한 번뿐인 교향악 축제라도 참가하듯 매번 연주 리허설에 불타오르듯 임했다. 연습시간 배분을 잘하지 못해 마무리를 잘 못하고 본 연주회에 임하기 일쑤였다. 음반 녹음에서도 부분 수정에 익숙하지 못해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연주했다.


사교적이지 못한 데다 어눌했지만 베를린 필뿐 아니라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모든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베를린 필의 한 단원은 자기들끼리 연습하고 있는데 갑자기 음색이 달라지고 생기를 띠어 둘러보니 푸르트벵글러가 거기 서 있었다고 회고했다. 존재만으로도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진짜 지휘자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닐까. 세계 어느 악단이나 연주가 비슷비슷해지고 지휘자의 지휘도 평준화하는 세상에서 푸르트벵글러는 더욱 그리운 이름이다.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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