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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의 행복심리학] 증오는 내 안의 毒, 가장 좋은 치료제는 용서

최종수정 2020.09.16 14:25 기사입력 2020.09.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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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용서의 힘

이용범 소설가

이용범 소설가

2007년 개봉한 영화 '밀양'은 우리에게 용서의 의미를 묻는다. 아들 잃은 주인공은 신앙의 힘으로 이웃집에 살았던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용기 내어 교도소로 찾아간 주인공에게 살인범은 신께 용서를 구하고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에게 용서받은 걸까. 신에게는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을까.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순 없다. 신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종교 영역에 한정된다. 신 혹은 신의 대리인은 속죄한 자에게 구원을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살인 행위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계율이 무너지면 종교도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구원과 심판의 권능을 동시에 행사한다.

인면수심의 범죄까지 종교의 이름으로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가해다. 용서가 아름다운 것은 그 과정에 피해자의 고통스런 선택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용서는 개인의 자율적 선택에 따라 이뤄져야 의미를 갖는다.


◆나를 치유하는 용서= 복수는 달콤하지만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런 상호보복의 고리를 끊게 하는 것이 바로 용서다. 영국의 심리학자 조안나 노스는 용서를 '가해자에 대한 보복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복수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것처럼 용서도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피해자의 일방적인 손해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화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용서는 상호보복으로 집단이 자멸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방지해준다. 또 내면에서 꿈틀대는 복수심을 잠재움으로써 피해자로 하여금 무모한 위험에 뛰어들지 않게 해준다. 이 때문에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 사이에서는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성향이 진화해왔다. 용서는 공격성만큼이나 자연선택된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상대의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먼저 무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상대도 무기를 내려놓지 못한다. 용서란 가해자에게 복수는 포기하겠다는 사실을 알리는 행위다. 이는 상대방의 심장을 겨누고 있던 무기부터 내려놓겠다는 의사표시다. 더 이상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 용서는 곧 적에게 평화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다.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안고 있는 고통을 감소시키고 협력을 촉진한다. 사람들은 용서를 상대방의 잘못이나 자신이 입은 상처를 잊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가해자와 관계를 개선하거나 화해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용서는 가해자를 이해하거나 가해자와 화해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가 저지른 죄를 잊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잘못을 없던 일로 해주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가해자에 대한 증오뿐 아니라 가해자를 향한 요구와 기대도 내려놓는 행위다. 이는 가해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가해자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주도권을 가해자에게서 내게로 되찾아오는 행위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깊은 분노와 두려움을 안고 산다. 이들은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으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면역기능도 약하다. 그러므로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학대와 다를 바 없다.


용서하지 못하면 자기 내면을 분노와 증오로 가득 채운 채 살아가게 된다. 용서의 목적은 가해자를 해방시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되찾는 데 있다. 용서하지 않고 행복해질 수는 없다. 용서는 복수심과 증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다.

영화 '밀양'

영화 '밀양'


복수는 달콤하지만 또다른 복수로
용서는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

일방적인 손해·굴복처럼 보이지만
평화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
가해자도 책임 인정해야 진짜 용서

◆용서의 조건= 드라마 주인공들은 숱한 고난 뒤에야 악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 악인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오로지 복수의 순간만 노려온 주인공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악인의 뉘우침은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다.


드라마 속의 악인은 주인공이 방심한 틈에 반격하다 더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정당한가.


미국 텍사스주 소재 크리스천대학 브라이트신학대학원의 강남순 교수는 저서 '용서에 대하여'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오해를 적시한 바 있다. 용서가 종교적이고 영적인 주제라는 오해,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용서도 가능하다는 오해, 사건을 잊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는 오해가 바로 그것이다.


무작정 잊기보다 분명히 기억함으로써 상처의 재발을 막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피해자에게 분란만 일으키지 말고 모든 것을 잊으라는 요구는 가해자를 편드는 일일 수 있다.


우리가 용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원한 극복과 복수 포기다. 원한은 마음의 독(毒)이다. 만질수록 더 악화하는 종기처럼 원한은 되뇔수록 더 깊어진다. 가해자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원한과 분노를 버리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버려야 할 것은 증오와 복수로 이어지는 분노이지 도덕적 분노가 아니다. 원한의 대상은 부도덕한 행동이지 그 행동의 당사자가 아니다. 용서해야 할 대상은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가해자가 부당한 행위로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용서받으려면 가해자가 잘못을 인식하고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용서는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이 묻힌 상태에서는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진실이 알려져야 피해자는 상처에 박힌 기억의 파편들부터 제거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다.

영화 '밀양'

영화 '밀양'


과거의 집착은 끔찍한 자기비하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용서의 힘

영화 '밀양'이 묻는 용서의 의미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능한가

◆용서에 이르는 길=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사람에 대한 용서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들 잃은 어머니가 아들 살해범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상상해보라. 흔히들 어머니가 살인범을 용서하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듯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에 대한 용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고 용서하기가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모든 감정과 기대를 내려놓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용서란 이제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단호하고도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자 선택이기 때문이다.


과거 사건에 평생 집착하는 것은 자기처벌일 뿐 아니라 끔찍한 자기비하다. 용서는 과거의 상처와 함께 복수의 감정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수를 사랑할 필요도, 상처 준 사람과 관계를 회복할 필요도 없다. 용서는 내 안에 있는 증오와 분노를 떠나보내는 것이지 가해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해자와 만나거나 대화할 필요도 없다.


용서는 가해자와 관계없이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무력한 희생자 처지에서 벗어나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오는 것이다.


용서는 과거의 기억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먼저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자. 편지를 당사자에게 전달하지 않고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둬도 된다. 누군가를 용서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용서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늘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이 용서한 만큼만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용서할 때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혜택을 준다. 용서 그 자체가 치유이자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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