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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딸깍발이] 無名 광복투사, 잊지 않겠습니다

최종수정 2020.08.14 10:17 기사입력 2020.08.1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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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딸깍발이] 無名 광복투사, 잊지 않겠습니다

[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 '이재명'? 열이면 열, 경기도지사 이재명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해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인물이다.


이 의사는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이완용 차례라고 생각해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완용이 종현 천주교당(현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의사는 군밤 장수로 변장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의사는 미사가 끝나고 교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틈바구니에서 이완용을 발견한다. 그리고 비수를 들고 달려들어 이완용의 허리부터 일격했다. 혼비백산한 그가 달아나려 하자 3곳을 더 찔렀다. 주변에 유혈이 낭자했다.

이 의사는 목적이 달성됐다 여기고 만세를 불렀다. 순간 이완용 경호원들인 일본 경찰과 조선인에게 허벅지를 찔리며 체포됐다. 이 의사는 거사 직후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공범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런 큰일을 하는 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며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변론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의 행동에 어찌 구구한 변론이 있을 법인가"라며 껄껄 웃었다.


이완용은 과다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일본 최고 외과의의 수술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수개월간 요양한 뒤 총리직에 복귀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통감과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했다.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하다 1926년 68세로 사망했다. 다만 말년에 해소·천식으로 고통받았다. 사인은 이 의사의 칼에 맞아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운동 당시 충남 천안 아우네장터 시위의 주역인 김구응이 있다. 교사인 그는 지역사회의 폭넓은 인간관계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유관순이 연락과 봉화 점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면 김구응은 전체 계획을 짠 리더였다.

거사일로 정한 아우내 장날인 4월1일 아침, 장터에는 전날 밤 타오른 횃불을 보고 장꾼으로 가장한 군중 3000여명이 모여들었다. 군중은 점차 불어나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6000명을 웃돌았다. 김구응이 두루마리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하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만세운동은 지극히 평화적이었지만 일본 헌병들이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김구응은 독립선언문을 말아 들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일본 헌병이 김구응을 총으로 쏴 쓰러뜨린 뒤 총검으로 머리까지 짓이겼다. 그리고 다시 머리에 대고 총을 쐈다. 당시 32세이던 김구응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재명, 이완용 처단 실패 교수형…김구응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리더
남북분단 이념·정치 등의 이유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20명 독립투사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후손이 사는 모습까지 절절히 담아

'우리가 버린 독립운동가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책이다. 무명의 독립투사들의 후손과 그들이 사는 모습까지 일일이 찾아 적은 절절한 글이다. 그리고 이들이 조명받지 못한 정치, 이념, 현실적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미국에 세운 군사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한 박용만, 연해주에서 빨치산 부대를 이끈 일본군 장교 출신 김경천, 김좌진과 함께 만주 독립군 3대 맹장으로 꼽히는 김동삼과 오동진, 상하이 임시정부의 자금줄 역할을 한 안희제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 책에서 언급된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 잊힌 걸까. 글쓴이는 무엇보다 이념 문제를 꼽는다. 광복에 이은 남북 분단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도 갈려버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김원봉이나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그 전까지는 우리가 잘 모르던 이들이다. 중국과 손잡은 양세붕이나 러시아와 협력한 김경천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다.


이념과 별개로 정치적 이유에서 잊힌 경우도 있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이승만과 대립하게 됐다. 두 사람은 한때 의형제까지 맺었지만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완전히 절연한다. 해방 후 박용만의 업적이 덜 알려지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자료가 부족한 데다 업적을 알릴 후손이 없었다는 것도 현실적 이유다. 특히 북한 지역이나 중국ㆍ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 후손이 있다면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선양사업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집안은 풍비박산되기 일쑤였다. 후손이 있어도 외국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수록된 20명은 행적이 얼마간 전해지고 자료가 남은 덕에 소수에게나마 알려질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등록된 인물만 1만5000여명이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이는 얼마나 될까. 더욱이 행적이 알려지지 않거나 북한에 남았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도 부지기수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비밀리에 활동했다. 논문 한쪽에 행적이 겨우 한 줄 적혀 있거나 어떤 사료에도 흔적이 없는 이가 무수하다. 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무명의 독립군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글쓴이의 진정한 목적은 단지 몇 명의 독립운동가를 더 소개하는 게 아니다. 훨씬 많은 독립운동가가 기억 저편에 묻혀 있음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글쓴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가 버린 독립운동가들/손성진 지음/개마고원/1만5000원)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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