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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선달의 어원

최종수정 2020.06.30 11:16 기사입력 2020.06.3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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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년 함경도 길주에서 개최된 무과시험 장면을 그린 기록화인 '북새선은도'에 나온 무과시험장의 모습[이미지출처=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1664년 함경도 길주에서 개최된 무과시험 장면을 그린 기록화인 '북새선은도'에 나온 무과시험장의 모습[이미지출처=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민간 설화에서 조선 시대 희대의 사기꾼으로 널리 알려진 '봉이 김선달'은 흔히 본명을 김선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의 본명은 김인홍으로 전해진다. 선달은 조선 후기 무과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채 다른 생업에 종사하거나 백수 생활을 하던 과거 합격자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극소수에 불과하던 선달은 17세기부터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부터 임금이 민심 수습용으로 비정기 무과시험을 매년 개최해 5000명에서 1만명 이상씩 응시생 대부분을 합격시키면서 대량으로 양산된 탓이다.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경우에는 1676년 자신의 재위 2주년을 기념한다며 무려 1만8000명 이상을 합격시켰다. 원래 규정상 정해진 합격자 28명을 크게 뛰어넘는 수였다. 만 명 이상이 합격하는 시험이란 뜻에서 이런 비정기 시험은 '만과'라 불렸다.

만과의 시험과목은 그날 임금의 기분에 따라 바뀌었다. 즉석에서 활을 쏘게 해서 10발만 맞추면 모조리 합격시키거나 임금이 기분이 좋으면 시험장에 나온 응시생 전원을 그냥 합격시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본래 필기시험과 창술, 검술, 기마술, 조총사격 등 실기시험까지 봐야 하는 정기 무과시험에 비하면 시험이라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왕실의 결혼이나 회갑연 같은 경사가 있을 때도 만과가 열렸고, 선달은 매해 크게 늘어났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무과시험 합격자가 문과시험 합격자보다 3배 이상 많은 15만명으로 불어난 것도 이 만과 때문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까지만 해도 전란으로 죽은 군인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만과로 들어온 선달도 정규 군인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후 복구가 이뤄진 18세기부터는 채용할 자리보다 선달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선달들은 정식 군인으로 임용되기 위해 중앙 정계에 뇌물을 바쳐야 했고, 조선 왕조 말기인 19세기 말에는 아예 조정에서 선달을 대상으로 무관직 매관매직에 나서 벼슬 가격을 공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조선의 국방 체계를 망친 큰 폐해 중 하나로 만과와 선달을 언급할 정도였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속여 팔아야 할 정도로 돈에 집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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