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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정여립과 대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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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이이 배반 혐의 선조에 미운털…왕권 부정 무력 통한 체제전복 야망
1585년 고향 전주에서 대동계 구성…추종자 모아 학문·무예 익히며 준비
1589년 병기고 탈취-모반 꿈꿨지만…관군에 계책 누설 진안 죽도서 자결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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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년) 10월1일 조선 조정에 여러 대신이 모인 가운데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윽고 선조가 "여립(汝立)은 어떠한 자인가"라고 물었다. 영의정 유전(柳琠)과 좌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그의 인품은 잘 모르겠사옵니다"라고 답했다.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그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옵니다"라고 답했다. 선조는 들고 있던 고장(告狀)을 집어던지며 "독서하는 자의 하는 짓이 이와 같단 말인가"라며 불같이 화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으로 조선이 발칵 뒤집혔다.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으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임진왜란 발발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정여립은 선조의 왕권을 부정하고 무력으로 체제전복을 꾀하다 사전에 발각돼 자결했다. 정여립과 연루돼 희생된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역모에 대한 진위 문제, 관련자 처벌 문제로 조선 후기 내내 논란의 대상이 됐다. 현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사건을 보는 관점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정여립의 역모 사실 자체는 대체로 인정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정여립은 어떤 계획을 통해 무력으로 쿠데타에 나서려 했을까.


정여립은 전북 전주 출신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다. 그는 율곡 이이(李珥)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중앙 정계의 청요직(淸要職)인 홍문관 수찬(修撰) 등을 지내며 당시 관료 사회에서 상당한 명망도 얻었다.


정여립은 이이 사후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스승격인 이이를 배반했다는 혐의로 선조에게 심히 배척 받았다. 정여립을 중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번번이 거부했다. 정여립 역시 선조 아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절감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이때가 역모 4년 전인 1585년의 일이었다.

정여립은 전주에서 추종자들을 규합해 조정의 시사에 대해 논했다. 한편 강학(講學)에 열중하고 무예도 연마했다.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인물 유하혜(柳下惠)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한 말을 추종자들에게 설파했다. 이때부터 선조 중심 왕조 체제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준비 작업에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활동을 구체화하고 자기의 무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한 게 바로 대동계(大同契)다. 대동계에 대해서는 관련 사료가 거의 없어 그 규모와 운용의 뚜렷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대동계 구성원들은 매달 15일(보름) 한 차례 회합해 글을 배우고 활 쏘기, 말 타는 법, 칼과 창 쓰는 법도 익혔다. 필요 자금과 음식은 정여립이 직접 마련했다. 대동계 구성원들은 반상(班常)과 공사천예(公私賤隸)가 함께 포함돼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다양한 신분 계층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1587년 전남 여수 손죽도로 왜구가 쳐들어온 정해왜변(丁亥倭變)이 일어났다. 당시 왜구는 규모가 꽤 커 조정에서 방어사로 변협(邊協)과 신립(申砬)을 보냈을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이 군사들을 제대로 편성하지 못했다. 그는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여립이 군사들을 모으고 부서를 나누는 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그들 장령(將領) 모두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 소속이었다. 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장령들에게 "훗날 변고가 있으면 너희들은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시에 와서 기다리라"고 명한 뒤 군부(軍簿) 1건을 직접 갖고 갔다.


이로 볼 때 대동계는 준군사 조직으로 상당히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정여립이 군부 1건을 직접 갖고 갔다는 점에서 향후 군사동원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훈의 한국유사]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정여립과 대동계 원본보기 아이콘

정여립은 고향 전주를 중심으로 왕조 체제 전복 준비에 차근차근 나섰다. 하지만 그가 자기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공들인 지역은 황해도였다. 황해도는 조선 개국 이래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대명 사대외교 사절이 왕래하던 길목이었다. 따라서 어떤 지역보다 공물 및 각종 부역 부담이 가중돼 백성들의 불만은 팽배했다.


이미 명종 때 임꺽정의 반란(1559~1562)이 황해도 지역에서 일어나 민심은 크게 흉흉해져 있었다. 선조 대에도 이 지역에서 나라를 원망하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백성 위무 활동이 시급하다는 견해가 여러 차례 개진된 상태였다.


정여립은 1588~1589년 황해도 지역 지방관으로 가기 위해 중앙 정계의 인맥을 움직였다. 황해도 지방으로 직접 가 지방관의 공적 권위에 가탁해 불만 세력을 조직화하고 유사시 이를 군사력으로 활용할 의도였던 듯하다. 이는 자기의 세력 기반인 대동계를 황해도까지 확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황해도는 도성(都城)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 전략상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황해도 평산에 있던 이귀(李貴)의 군대가 신속히 남하해 도성 진입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군사상 이점 덕이었다.


정여립의 쿠데타 세력이 남쪽 전주에서 거병하고 동시에 황해도에서도 일어난다면 도성을 둘러싼 남북 협공 전략은 성립되는 셈이었다. 물론 이는 직접적 증거 기록이 없는 단순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황해도에 대한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합리적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여립의 황해도 지방관 발탁 시도는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황해도 지방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높았다. 그 결과 이 지역에 대한 공작은 계속됐던 것 같다. 정여립의 수하들이 전주와 황해도를 부지런히 오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들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참언(讖言)을 황해도에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 우리 백성들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에는 수륙(水陸)의 조례와 일족 이웃의 요역과 추쇄(推刷) 등의 일을 모두 감면할 것이고, 공사천(公私賤)과 서얼(庶孼)을 금고(禁錮)하는 법을 모두 혁파할 것이니, 이로부터 국가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


당시 황해도에서 과도한 요역 동원과 그에 따른 도망자 급증, 노비와 서얼의 차별 지속 등 사회 모순이 심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여립 추종자였던 조구(趙球)가 무리를 불러모으고 그들에게 후추와 부채를 나눠줬다. 그 수효가 100명이나 됐다.


정여립이 자결한 뒤 이 사건을 조사할 때 성혼(成渾)은 상소에서 황해도 백성들이 '정여립 불사설(不死說)' 운운하며 군사가 일어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할 정도였다고 썼다. 정여립이 거병한다는 고변(告變)은 전주가 아닌 황해도에서 먼저 올라왔다. 이는 황해도에서 정여립에게 동조했던 인물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소문이 확산하자 정여립은 계책을 수립했다. 얼음이 어는 겨울이 되면 도성을 침범해 무기고를 불태우고 창고는 빼앗은 다음 도성 안에 배치한 심복으로 하여금 내응하도록 조치했다. 게다가 나눠 보낸 자객으로 하여금 신립과 병조판서부터 죽이고 이들을 사칭해 병사(兵使)와 방백(方伯)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대관(臺官)에게 청탁해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면한 뒤 그 틈에 거사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정여립의 계책이 누설되고 조선 정부는 발빠르게 정여립을 찾아나섰다. 결국 정여립은 전북 진안의 죽도(竹島)에서 관군에게 포위돼 자결하고 말았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정여립은 휘하의 대동계를 움직여 저항하지 않았을까. 이는 대동계라는 조직의 운용과 연관 있을 것 같다. 이 문제와 관련해 시사점을 좀 얻을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선조수정실록' 중 사건 당시 정여립 잔당을 토벌하고 민심을 수습하다 서울로 올라온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과 선조의 대화다.


선조가 "역변이 발각될 당시 군사와 무기가 있었을 것인데 끝내 찾아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이광은 "정여립이 평소에 유자(儒者)로 자처했으니 병사를 모으고 무기를 사들이고 싶어도 형편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따라서 미리 비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답했다.


선조가 "그렇다면 역적이 맨주먹으로 난을 일으킬 계획이었던가"라고 물으니 이광은 이렇게 답했다. "역적들의 간사한 꾀를 전부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나라 안에 있는 병기고는 대부분 방어할 만한 성벽이 없습니다. 따라서 적이 초기에 농기구를 들고 일어나더라도 한 고을의 병기고를 불시에 덮친다면 무기가 저절로 충분해질 터인데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선조도 이 말을 그럴 듯하게 여겼다.


대화 내용으로 추론해 보건대 정여립의 대동계는 일반 군대와 달리 상비조직이 아니었다. 무기를 갖추고 항상 대기 상태에서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성격의 조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소 정여립이 유학자로 행세했다는 점에서 대동계 조직은 노출을 꺼려 지하 점조직으로 운용됐던 것 같다.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점조직을 관리하다 유사시 정여립의 명령이 떨어지면 거병해 빠르게 선공(先攻)하는 전략으로 나선 듯하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고변으로 정여립은 급히 쫓기게 되고 이로써 대동계를 제대로 동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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