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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자오쯔양과 톈안먼사건

최종수정 2020.01.17 10:43 기사입력 2020.01.1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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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자오쯔양과 톈안먼사건

"1976년 4월4일 저우언라이를 추도하기 위해 톈안먼광장에 모인 군중이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에 화환을 바치는 가운데 마오쩌둥과 장칭 등 문혁파(文革派)를 비난하는 표어와 구호가 나붙었다. 이에 베이징시 당국이 5일 새벽 저우언라이를 추도하는 화환을 철거하자 청년 학생들이 방화 등을 하며 시위, 마오쩌둥ㆍ장칭 집단은 톈안먼광장에 정규군 3개 사단과 약 4만명의 민병을 투입해 유혈 진압함으로써 3000여명이 사망·부상·체포당했다."(박문각·시사상식사전)


이 일을 '톈안먼사건'으로 알고 있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우리 기억에는 1989년에 '천안문사태'로 알려진 중국 민주화운동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2차 톈안먼사건'이다.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 총서기가 죽자 그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후야오방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기억하는 대학생들은 부패와 관료주의 척결을 내세우며 궐기했다.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은 5월13일부터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단식 연좌시위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장에는 언론자유, 정치개혁, 부패척결, 민주화 실현 등 정치구호가 등장했다. 리펑 당시 총리는 "국제 적대세력의 조종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이라고 규정하며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자오쯔양 당시 총서기는 이에 반대했다. 자오 총서기는 5월4일 아시아개발은행 회의에서 "이번 시위는 애국학생의 애국운동"이라고 했다. 그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써 역사와 인민, 정치를 향한 소신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자오 총서기는 톈안먼시위를 '5·4의 열정'이라고 표현했다. 5·4운동은 1919년 5월4일 베이징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이다. 1989년 5월19일 새벽, 자오 총서기가 시위대 앞에 나타났다. 인민복 차림에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단식농성을 풀라고 애원했다. "미안합니다. 동지들, 제가 너무 늦게 왔지요.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세요!" 이튿날 베이징에 계엄이 선포됐다.


중국공산당의 인식은 자오 총서기의 진심과 거리가 멀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덩샤오핑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당 원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6월4일 시위대를 향해 발포할 것을 명령했다. "20만명이 죽더라도 20년의 평화와 안정이 올 수 있다면 어쩔 수 없다." 탱크와 장갑차가 밀고 들어가 이틀 만에 시위를 진압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 5000여명, 부상 3만여명에 이르는 유혈 참극이었다.

자오 총서기는 6월23일에 열린 제13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에서 숙청됐다. 반란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2005년 1월17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택 연금을 당했다. 죽은 뒤에도 복권되지 못한 그의 장례식을 중국 공산당이 비공개로 치렀다. 중학 중퇴의 학력으로 총서기까지 오른 거인, 과감한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으로 한때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정치가는 이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톈안먼사건은 중국 현대사의 오점으로 남았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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