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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사랑의 묘약

최종수정 2019.11.29 10:44 기사입력 2019.11.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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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사랑의 묘약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청마(靑馬)의 첫 줄은 짜릿하다. 유치환. 오늘도 에메랄드빛 하늘이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쓰는 사나이. 그는 안녕을 고하며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고 고백한다. 붉은 마음은 괴로움을 열락으로 삼는다. 사랑은 무심할 뿐인가. 시인의 언어는 만고에 빛나거니와 고통은 이미 심장을 찌른다.


그 고통이 두려웠으리라. 인간은 '사랑의 묘약'을 발명하였다. 이 영약은 즉효를 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라. 아일랜드 청년과 공주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다. 그 사랑이 운명마저 불태운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레뤼산드로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에로스의 화살에 맞은 꽃즙이 눈꺼풀을 적신 것이다. 그러나 묘약은 위험한 처방.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비운 잔 앞에서 시녀 블랑게네는 절규한다. "당신들은 죽음을 마셨습니다."


왕자에게 반한 인어공주는 마녀를 찾아가 사람 될 약을 청한다. 그리하여 두 다리를 얻고 목소리를 잃었다. 공주가 들이켠 마약은 묘약의 다른 버전이다. 공주는 왕자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할 운명 앞에 놓인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음으로 인도한 저 원망스러운 물약도 묘약의 또 다른 버전이라면? 어찌하여 사랑의 묘약은 이토록 음산한 예언을 품고 있는가.

하지만 1797년 오늘 베르가모에서 태어난 사나이, 가에타노 도니체티는 사랑 앞에서도 사랑의 묘약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쓴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는 진심을 담은 사랑이 형편없는 포도주조차 신비의 영약으로 둔갑시켜 가난한 시골 청년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네모리노는 농장주의 딸 아디나를 사랑한다.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돌팔이 약장수 둘카마라가 파는 사랑의 묘약을 사서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는 아디나를 찾아가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그가 마신 묘약은 싸구려 포도주. 아디나는 술 냄새 풍기는 네모리노가 불쾌할 뿐이다. 술에서 깬 네모리노는 그날 저녁 아디나가 군인 벨코레와 결혼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네모리노는 불굴의 사나이. 그가 부르는 저 유명한 아리아,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들어보라. "하느님, 죽어도 좋습니다. 이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아, 하느님 죽어도 좋습니다. 이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사랑으로 죽을 수 있다면!" 이야말로 청마의 붉은 심장이요, 인어공주의 순정이 아닌가. "죽음의 신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 내 사랑을 위해서!"('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의 대사)


하지만 도니체티의 하느님은 냉혹한 창조주가 아니다. 네모리노는 애가 탄 나머지 사랑의 묘약을 더 마시기로 한다. 그런데 돈이 없네. 궁리 끝에 벨코레의 부대에 입대해 받은 돈으로 묘약을 산다.


이제야 약효를 보는가. 삼촌이 세상을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남긴다. 대번에 일등 신랑감이 된 네모리노는 이게 다 묘약 덕이라고 믿는다.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자신의 사랑을 얻고자 군인이 될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한다. 다음 이야기는 상상에 맡긴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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