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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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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제천(74)은 1984년 미국 아이오와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참가한다. 그의 시집 '장자시'에 감명받은 주최 측에서 초청했다. 시인은 평생 우정을 나눌 친구를 아이오와에서 만난다. 뤼베크에서 태어나 브레멘에서 방송 일을 하는 독일 시인 미하엘 오거스틴(64)이다. 두 사람은 메이플라워아파트 8층에서 석 달 동안 살았다. 박제천은 이때의 일을 시로 기록했다.


'아이오와에서 녀석과 함께 들르는 술집은 두 군데/아일랜드 맥주만 파는 집과 18개국 55종의 맥주를 파는 집/아일랜드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아일랜드 시인들을 위해 건배했고/수많은 나라의 맥주를 음미하며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건배했다/그런 밤마다 우리는 아이오와의 새벽거리를 걸어서 돌아왔다 (중략) 다리를 지날 적엔 검은 개울물에 번쩍번쩍 빛나는 오줌을 싸 갈겼다…' (박제천의 '어깨동무' 중에서)

박제천은 장발에 콧수염을 단 오거스틴을 '해적 같다'고 놀렸다. 오거스틴은 다음 날 아침 사전을 뒤적여 '술고래'라는 한국어를 찾아냈다. 그날 이후로 해적과 술고래는 더욱 진진하게 술을 마셔댔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했다. 언어는 자주 엇갈렸지만 서로를 100% 이해했다. 체구는 달라도 영혼의 무게가 일치했다. 박제천은 이때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물리적으로 환기된 시기"라고 기억한다.


박제천이 오거스틴을 보고 떠올린 해적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 아프리카 동해안이나 동남아시아 바다에서 설치는 흉포한 무리와는 같지 않으리라. 굳이 찾는다면 피터 팬의 적수인 '후크 선장'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면 스티븐슨의 '보물선'에 나오는 실버를 닮았을지 모른다. 이들은 분명 악당이지만 무섭기보다 익살맞다. 외팔이와 외다리라는 장애 또는 결핍이 이들의 공통분모다.


후크나 실버는 이야기 속의 해적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는 인간의 역사를 바꾼 진짜 해적들이 출몰했다. 한때 카이사르와 로마의 패권을 다툰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해 명성을 드높였다. 베네치아의 도제(국가원수) 피에트로 오르세올로는 아드리아해의 해적을 몰아내고 위대한 해상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신라의 장보고는 당나라 해적들을 쓸어버리고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조선의 이종무는 왜구의 소굴 쓰시마를 정벌해 실록에 이름을 새겼다.

해적이 늘 토벌의 대상은 아니었다.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친척이 운영하는 노예 무역선에서 일했다. 1568년, 스페인 함대의 습격을 받아 거액의 이익금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서 빌린 선박까지 뺏겼다. 분노한 드레이크는 해적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여왕이 내준 '해적 허가증(사략 허가증ㆍprivateer's license)'을 내걸고 스페인 상선을 공격했다. 그가 약탈한 금은보화는 왕실의 재원이 됐다. 드레이크는 훗날 기사작위를 받고 영국함대 사령관으로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드레이크는 성공한 해적이다. 그러나 1680년에 태어난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티치는 서인도 제도와 미국 동부 해안을 누비며 역사상 가장 흉포한 해적이라는 악명을 떨쳤다. 그는 약탈한 배에 생존자를 남기지 않았다. 1718년 11월22일, 티치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값을 치렀다. 버지니아의 로버트 메이너드 중위가 소규모 병력으로 티치의 무리를 섬멸했다. 메이너드 중위는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고 해적들을 겁주기 위해 뱃머리에 티치의 머리를 매달고 다녔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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