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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맨발의 아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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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문태준이 쓴 '맨발'의 앞부분이다. 저 맨발은 아마도 개조개의 수관, 숨길이리라. 개조개가 맨발을 내놓음은 빈사의 고백이요, 미구에 닥쳐올 죽음의 고지다. 시인은 맨발을 내민 개조개를 걸개로 삼아 '삶의 극단적 고행을 걸어간 부처와 그런 삶을 견뎌내는 가난한 가장을 성찰과 연민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헤아려낸다(김동원).

또한 저 맨발은 송수권에 이르러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한밤중 병실마다 불 꺼진 사막을 지나/침대차는 굴러 간다/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아내의 맨발)'로 형상화한다. 시인은 아내의 맨발에서 언젠가 목격한 바다거북이, 산란을 마치고 바다로 돌아가다 사윈 생명을 떠올린다.


정지용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그곳, 넓은 벌 동쪽 끝에서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은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향수)'이다. 열두 살 동갑내기 가시버시여.


맨발은 왜 그토록 쓸쓸한가. 맨발은 왜 그토록 슬픈가. 맨발은 왜 그토록 짜릿한 끌림인가. 맨발은 왜 그토록 우리들, 우리들인가. 그러나 어떤 순간 맨발은 우리의 온몸이 되고 전체가 되고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온 생애를 기울여 디뎌가는 누군가의 발자국은 끝내 맨발이 아니던가. 맨발은 순례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삶이며 그 일부분이다.

또한 세상의 다른 편에서 맨발은 또한 자유이며 생명이라. 이사도라 덩컨은 영원히 맨발이었으되 "나는 니체에게서 춤을 배웠다"고 했다. 니체가 보기에 춤은 인간 육체의 산물이 아니다.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육체의 인간이 태어난다. 니체에게 육화된 삶의 구체성을 회복해야 할 무대는 대지요, 그 의식은 춤(Tanz)이다.


춤은 대지와 숨을 섞는 행위인 동시에 가열한 투쟁이다. 대지란 중력이며 인력이어서 삶의 고랑에 인간을 못 박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도약하는 존재이며 달리는 생물이다. 삶의 모든 국면이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로되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선언이 된다. 위대한 전사 아베베 비킬라에게 맨발은 불굴이며 대지는 운명이 아니었는가.


아베베는 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그가 맨발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은 영원한 이미지로 올림픽 역사에 남았다. 원래 맨발로 뛰던 선수는 아니었다. 운동화가 낡아 새로 마련했는데 발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맨발로 달릴 결심을 했다. 4년 뒤 도쿄올림픽에는 운동화를 신고 나가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우리는 1973년 오늘 세상을 떠난 그를 영원히 '맨발의 아베베'로 기억한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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