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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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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이 놀이터였던 시절. 공을 가진 친구가 있으면 축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빗물이 고여 질척거리면 그나마도 어려웠다. 허연 연탄재를 가져다 밟아도 소용 없었다. 구정물은 솟아나기라도 하듯 골목 여기저기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런 날이면 하릴없이 처마 아래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놀았다. 이회택, 김정남, 이세연의 시대였다. 차범근이란 별은 아직 뜨지 않았다. 입심 좋은 친구가 직접 보기라도 한 듯 주워섬기는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무도 뚫을 수 없는 골키퍼(아마 야신이었을 것이다)와 펠레가 대결했다. 펠레는 '바나나킥'을 비롯해 온갖 절묘한 슛을 다 날렸지만 골키퍼가 모두 막아냈다. 그러자 펠레는 온힘을 다해 대포알 슛을 날렸다. 골키퍼가 그 공을 막기는 했지만 내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골키퍼가 공을 안은 채 날아가 그물에 걸렸다는 외전도 있고 애꿎은 유세비오(에우제비오)를 끌어들인 별전도 있다. "펠레의 절묘한 슛을 모두 막은 골키퍼가 유세비오의 슛을 막다가 내장이 터져 죽었다"는.


아무튼 펠레는 최고였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 때 혜성처럼 등장한 열일곱 살 소년은 축구사에 영원할 이름이 됐다. 스웨덴 사람들에게 얼마나 선명한 기억을 남겼던지 199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92)를 취재하러 갔을 때 둘러본 감라스탄(스톡홀름 구시가지)의 헌책방에는 펠레에 대한 책이 수없이 많았다. 스웨덴과 치른 결승전에서 후반 11분 소년이 넣은 브라질의 세 번째 골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높이 떠오른 공을 잡아 수비수를 제치고 그물을 흔들 때까지 공은 땅에 닿지 않는다.


스웨덴 월드컵을 담은 동영상 속 천재 소년은 흑인이다. 브라질은 인종차별이 적고 축구대표팀의 스타들 가운데는 흑인이나 남아메리카 선주민의 후예가 적지 않다. 2002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호나우두나 호나우지뉴도 흑인이다.

하지만 펠레가 등장하기 40년쯤 전에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모양이다. 브라질의 축구 클럽들은 식민종주국 포르투갈의 영향 아래 창설되고 발전했다. 엘리트 집단의 사교 모임과 같아서 당시 하류 계층에 속한 유색 인종 선수들이 넘볼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양정훈).


인종의 벽을 넘은 선수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다. 1892년 7월18일 상파울루에서 태어나 1969년 오늘 세상을 떠났다. 프리덴라이히는 독일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해방노예의 딸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 덕이었겠지만 그는 1909년 독일계 축구 클럽 SC게르마니아의 청소년 팀에 들어갔다. 클럽 경력은 1935년 플라멩구에서 마쳤다. 브라질 대표선수로는 1914년부터 1930년까지 열일곱 경기에 나가 여덟 골을 넣었다. 그는 통산 1329골을 넣어 축구 역사상 최다 득점자로 꼽힌다.


물론 당시의 통계 시스템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펠레는 진정한 의미에서 축구의 영웅이며 슈퍼스타다. 현대 축구가 기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프리덴라이히는 유색인으로서 '축구의 메시아' 펠레를 가능하게 만든 선구자 또는 요한과도 같은 예언자였다.


어떤 종목이든,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도움닫기가 필요하다. 밤하늘에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혜성도 사실은 멀고도 먼 우주의 외길을 쉼 없이 달려 거기 도착한 것이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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