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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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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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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3일, 축구 감독 거스 히딩크가 서울에 있는 세종대에서 명예 체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철수 세종대 총장은 수여식에서 "히딩크 감독은 리더십에 대한 비전과 일관성 있는 원칙을 통해 한국 축구팀을 세계 수준에 올려놓아 국민 통합과 국위 선양에 기여했다"고 학위 수여 이유를 설명했다. 히딩크의 답사가 걸작이다. "300여년 전의 한 네덜란드인처럼 나도 1년6개월 전에는 한국에서 난파당한 배와 같았다." 히딩크가 말한 '300여년 전 난파당한 네덜란드인'은 누구일까. 두 명을 떠올릴 수 있다.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와 헨드릭 하멜이다.


네덜란드 리프 지역에서 태어난 벨테브레이는 1626년 동양에 왔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했다. 제주도에 닿은 그는 동료 선원들과 함께 물을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잡혀 1628년 한양으로 압송됐다. 조선에 정착한 그는 박연(朴淵)이라는 이름을 얻고 조선 여자와 혼인해 1남1녀를 두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하기도 했다. 키가 크고 머리칼은 노랬으며 눈은 푸르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한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을 타고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다 태풍을 만나 1653년 오늘 제주도에 표착했다. 조정에서는 박연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박연은 하멜 일행과 이야기를 나눈 뒤 바닷가에 주저앉아 종일 옷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 제주도의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인들은 27년 만에 만나는 고국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때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 말을 거의 다 잊어 하멜 일행은 처음에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박연은 하멜 일행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


하멜은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한 다음 조선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를 썼다.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이 책은 '코리아'를 유럽 세계에 소개한 첫 서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하멜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조선에 억류돼 지낸 13년 동안의 일지를 적어 그동안 받지 못한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멜 표류기'는 조선을 미신과 무지가 지배하는 야만의 세계로 묘사했다. 그 필치는 혼란스럽다. "양반이나 중들은 절에서 유흥을 즐기는 무리로, 한국의 사찰은 매춘굴이나 술집과 같다"고 쓰기도 했다.


19세기에 외국인들이 쓴 텍스트에 등장하는 '코리안'은 '더럽고 게으르며 미개'했다. '겁이 많고 무기력하다'라거나 '부도덕하며 정신적으로 정체'돼 있고 '스스로 통제하는 자질이 없는 민족' 같은 표상이 사용됐다. 하멜의 표류기는 코리아에 대한 자료가 제한적이던 시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재료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한국인들에게 자학의 도구로 악용됐다. 한때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언론인이 '기독교적 자학사관'과 '친일사관'을 비판받으면서 낙마한 데서 보듯 한국인의 사고 속에 기생하며 끊임없이 분열과 자해의 소재이자 모티브가 된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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