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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54] 피노키오 상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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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내엔 피노키오 전문 상점이 있습니다. 판테온에서 돌아 나와 거리 구경을 하다가 문득 눈을 사로잡는 광경. 커다란 통유리 안쪽에 까마득한 어린 시절 친구가 수백 수천 짝의 나무 캐스터네츠 박수 소리로 저를 반겨줍니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를 향해 외치는 소리. 나무 부딪치는 소리. 나무 부딪치게 하는 바람 소리. 하늘과 땅 사이의 숨결 소리. ‘사람이 되고 싶어요!’ 피노키오 상점 앞에서 저는 아스라한 일곱 살 소년 시절로 날아갑니다.


피렌체가 고향인 카를로 콜로디(1826~1890). 피렌체 아동신문에 연재하여 15회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독자들의 요청으로 36회로 늘린 게 명작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입니다.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동화책이지요. 피렌체를 방문하면 콜로디의 생가나 피노키오 기념공원을 방문할 수 있을 테지만, 어쩌다가 마주친 로마의 피노키오 상점을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무작정 발을 들여놓고 봅니다.

온갖 종류의 피노키오가 진열되어 있군요. 목제 수공품입니다. 공방과 상점이 함께 있는데, 나무 한 토막이 피노키오로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지요. 어린아이 실물 크기만 한 것부터 한 뼘보다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피노키오가 동화의 나라에서 방금 나온 듯 초롱초롱 눈을 맞춥니다. 순진무구한 눈.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착하디착한 눈. 거짓말과 용기가 함께 들어 있는 눈. 피노키오 캐릭터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지요. 불가사의한 공존. 모순의 동거. 알고 보면 ‘피노키오의 모험’은 인간의 이항 대립적 양면성을 어린이용 버전으로 바꾼 이야기입니다.


거짓말과 용기는 중요한 두 코드. 나쁜 마음과 착한 마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요. 각각 징벌과 포상을 상징합니다. 거짓말과 용기는 어린이를 태우고 가는 마차의 수레바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하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몸속에 천사와 악마가 동거하듯이, 거짓말과 용기는 모든 어린이의 영혼 속에 뒤엉켜서 꿈틀거립니다. 사실은 이런 뒤죽박죽이 사람학교의 종례시간까지 이어진다는 게 문제이지요.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 같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외형의 변화이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코가 길어지는 벌칙은 그래서 효과적인 징벌 경계의 장치입니다. ‘거짓말하면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진단다. 그러면 창피해서 어떻게 하지?’ 이렇게 소곤거리면 우리 어린이들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용기는 좋은 마음을 실천하는 결단입니다. 말썽꾸러기 피노키오는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자기 주도적인 결정이지요. 저는 이것을 ‘마음 돌이키기’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마음 돌이켜 새로 걸어가려는 각오. 용기의 씨앗은 바로 이 순간에 뿌리를 내립니다. 결심한 피노키오가 길 떠나는 모습. 행인의 새로운 탄생이 왜 아니겠습니까.


피노키오가 고래에게 잡혀 먹힌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출하러 고래 배 속에 들어가는 순간은 죽음을 불사하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숭고한 이야기의 전형이 ‘죽음을 무릅쓰는 헌신’ 아니겠습니까. 인간을 벗어나는 더 높은 가치. 독일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초인(超人)의 단계로 나아가는 위대한 결행이 바로 진정한 용기인 것입니다. 이 순간의 결행으로 나무 인형에 불과했던 피노키오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포상을 받는 것이지요.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거듭난다는 뜻이 아니겠는지요. 다시 태어나기! 종교적으로는 부활이자 해탈일 테지요.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이야기는 결국 모든 인간도 거듭나야 한다는 교훈담인 셈입니다. 품격이 다른 인간, 차원 높은 삶을 지향하라는 권고이지요. 그래서 이 동화는 무명(無明)의 어둠에서 헤매는 모든 사람들이 눈 밝혀 읽어야 할 지혜서입니다.


상점 안의 피노키오들은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얼굴, 몸통, 팔다리, 고깔모자만 확실하게 구별됩니다. 기다란 코는 피노키오의 상징. 불편의 징벌을 받는 수행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피노키오의 온갖 시행착오를 보면서 전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인성교육을 받습니다. 한 권의 동화가 학교 전체가 할 일을 대신한다면 아마도 이 책이 아니겠는지요.


용수철에 매달려 공중에서 둥둥거리는 작은 피노키오 인형을 하나 삽니다. 나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대지에 발붙이지도 못하고 천상에 올라가지도 못한, 푸른 요정의 용서를 기다리는 저 미완의 캐릭터. 나 자신 같은, 우리 모두의 처지 같은, 길고 긴 빨간 코. 남도 속이고 스스로도 속이는 코. 진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이들만 만질 수 있는 피노키오의 코! 우리는 모두 그런 코를 가지고 있지요.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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